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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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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욱

서울시당 서부분회

공공운수노조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지부장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다 담을 그릇, 

사회주의”



# 공공운수노조 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지부장 신정욱 씨는 요즘 국회 앞 농성장에서 지낸다. 국회에 대학원생 조교‧연구원 등의 노동자성 인정, 산재 적용, 권력형 성폭력 근절 등 법안 통과를 요구하고 있다. 경북대 실험실 폭발사고로 사회적 여론이 형성됐고, 국정감사 전에 이낙연 민주당 대표를 면담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국회의원 관심이 높고, 법안 통과 가능성도 크다”고 기대감을 비치면서도 “여러 가지로 시기가 잘 맞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노동자성 인정을 좀 더 중심에 놓고 정면돌파할걸 아쉬움도 든다”라고 말했다.


<변혁정치>가 대학원생노조와 변혁당 서울시당 서부분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욱 씨를 만났다. 이날 인터뷰도 국회 농성장 인근에서 진행됐다.



어쩌다 음악, 

어쩌다 철학 하게 된 삶


올해 서른셋 정욱 씨는 적당히 모범적이고 적당히 불량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 5명과 밴드를 만들어 보컬을 맡았다. 크리스마스에 부산 남포동 클럽에서 공연할 정도로 잘 나갔다.


“지금도 고등학교 시절이 제일 재밌었다고 기억해요. 공식 밴드부가 아니었는데 친구들끼리 모여서 밴드 활동했어요. 동네 아저씨한테 월 8만 원 주고 작업실을 빌려서 음악 연습부터 온갖 걸 하고 지냈죠. 그때 친구들이랑 스무 살 되면 홍대에서 밴드 활동하자고 약속했는데, 제가 수능을 망쳐서 재수하게 된 거예요. 1년 늦었지만 스물한 살 때 그 약속을 지켰어요. 근데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금방 접었죠. (웃음)”


밴드 활동을 하면서도 문학, 음악, 사회문제 등에 골고루 관심이 있었다. 학교에서 전교조 선생님들을 좋아했고, 덕분에 박노자, 홍세화 등의 책도 읽었다. 그런 관심사가 모여 철학과로 진학했다. 막연했지만 ‘관념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고, 음악과 예술, 미학이 어우러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서였다.


“대학 입학하면서 서울로 왔어요.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겠다 선언하고,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25만 원짜리 집에 살았어요. 1940년대에 지어진, 쥐 나오는 집이었죠. 근데 제가 고등학교 때 이것저것 많이 해봐서 대학 동아리 활동, 미팅, 이런 게 다 시시하고 별로 재미가 없더라고요. 한 학기 만에 군대 갔다 왔어요.”


복학하고는 수업 듣고, 학교 사람들과 어울리고, 저녁이면 아르바이트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철학과 수업은 재밌었다. 하나의 이론체계를 배우고 이해할 때마다 지식이 쌓인다는 것과는 다른 앎의 기쁨이 있었다. 꼭 교수가 되고 싶다거나 아주 깊게 공부해보자는 마음은 아니었지만, 학‧석사 연계과정으로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음악미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정서론’이라는 게 있거든요. 가사 없는 음악들 있잖아요. 어떤 요소가 사람들에게 감동이나 기쁨 등 감정을 일으킬까 연구하는 분야에요. 신경과학, 뇌과학 등과도 연결되고. 아무래도 음악에 관심이 많다 보니 철학과에서도 그런 분야에 끌렸던 것 같아요.”



우연히 들어간 

대학원생 학생회,

조교 실태조사로 

대학 고발 나서


대학원에 진학하기 직전 집안 경제 상황이 나빠졌다. 대학원 다니면서 계속 장학금을 알아봐야 했다. 학과 조교를 하고 싶었는데, 자리가 마땅치 않아 대학원 학생회 문을 두드리게 됐다.


“별 뜻이 있어서 들어간 건 아니었어요. 장학금이 필요했죠. 마침 그해 대학원 총학생회장이 교육투쟁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고, 제가 기획국장을 맡게 됐어요. 학부에 있을 때부터 조교 형과 친해서, 조교의 노동시간, 하는 일 등을 자주 듣고 지냈어요. 그래서 대학원 학생회에서 조교생 근무실태 조사, 간담회 등을 추진했죠.”


그때 조사한 것들이 데이터가 됐고, 이듬해 대학원 학생회장을 맡으며 학교에 문제 제기를 시작했다.


“대학원생들과 조사한 것을 모아 총장을 고발해보자 뜻이 모였어요. 퇴직금 미지급, 근로계약서 미작성 등이 문제였죠. 대자보도 붙이고, 민변 찾아가서 소송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소송하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스토리펀딩으로 돈 300만 원을 모았어요. 진짜 고발하게 된 거죠. 학교가 법률 자문받고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바로 저자세로 나왔어요. 합의금을 주겠다는데 대신 총장 처벌불원서를 써달라고 하더라고요. 한참 그러다가 제 학생회장 임기가 끝나고, 그 사건은 흐지부지됐죠.”



대학원생에게도 

노조가 있었다면?

맨땅에서 시작한 

대학원생노조


그러면서 정욱 씨는 노동조합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노조가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당하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과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지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100만 촛불이 밝혀진 뒤, 대학 곳곳에서 심포지엄이 자주 열렸다. 우연한 계기로 정욱 씨가 한 심포지엄에 발제자로 초청받았고, 대학원생 조교의 노동자성 문제와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자리에 토론자로 나선 한 대학원생이 비슷한 고민을 말했고, 그에게 쪽지를 남겼다. 노조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같이 한번 해보자고.


“그때 만난 걸 계기로 계속 소통하게 됐어요. 제가 아는 대학원생을 긁어모으기 시작했죠. 간담회 같은 걸 6번 정도 했을 때, 노조를 만들자고 뜻이 모였어요. 노조설립추진위로 전환하고 회의를 이어갔죠. 근데 노조를 어떻게 만드는 건지 아무도 안 가르쳐 주잖아요. 그래서 포털 사이트에 민주노총을 검색해서 홈페이지에 들어갔죠. 거기 들어가면 노조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줄 만한 자료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노조 상담 전화통화를 하고 싶진 않았다. 자료만 보려고 했는데, 민주노총 홈페이지에 노조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자료가 없었다. 대신 3개월 기간제 상근활동가를 채용한다는 공고가 있었다.


“마침 민주노총 기획실에서 사람을 뽑는대요. 제가 그래도 대학원 학생회에서 기획국장 맡았잖아요. 한번 넣어봤죠. 같이 노조 준비하던 사람들에게는 3개월 일하면서 노조 어떻게 만드는지 등 배우고 오겠다 말씀드리고요.”


그렇게 시작된 민주노총 활동을 2년 반이나 이어갔다. 그사이 공공운수노조 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가 출범했고, 정욱 씨는 초대 사무국장을 맡다가 지금은 전임 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 가치를 담는 그릇, 

사회주의


변혁당 사람들은 민주노총에서 만났다. 주변에서 노조 활동을 알려주고 배움을 주는 사람들이 변혁당 소속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당원으로 가입하게 됐다.


“들어와 보니 당에 중간층이 없는 것 같아서 아쉬워요. 경험 많고 역량 있는 분들이 많은데요, 저 같은 신규 활동가도 많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을 중간에서 연결해주고 서로의 활동을 나누는 기회는 부족한 느낌? 저 같은 80년대생을 낀 세대라고 하긴 하더라고요. (웃음)”


정욱 씨에게 사회주의가 뭐냐고 물었더니 ‘그릇’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여러 가치가 있잖아요. 그걸 담을 그릇이 사회주의뿐인 것 같아요. 자본주의 수정으로는 안 되는 거죠. 저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 때문에 편견이 많았어요. 현실 사회주의가 최선인가? 아니죠. 자본주의도 얼굴을 계속 바꾸듯이, 사회주의도 개선할 수 있는 인간들의 사회 시스템이라 봐요.”


정욱 씨는 대학원생노조 농성을 시작하고 당원들에게 지지받으며 큰 힘을 얻었다고 했다.


“제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도움과 응원을 되게 많이 받았어요. 농성투쟁 하면서 당원들이 지지해주는데 되게 고맙고 힘이 났죠. 내가 옳았다고 자신감도 들고, 다른 당원 동지들이 하는 투쟁에 나도 같은 마음으로 보답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인터뷰 = 나위기관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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