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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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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펫과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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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는 책> 

카펫을 짜는 아이들

- 후상 모라디 케르마니(이현주‧이영민 옮김)청년사, 2007.


이선준┃기관지위원회



“네메쿠는 졸다가 감독관의 쇠사슬에 한 대 맞고는 깜짝 놀라 깨어났다. 쇠사슬에 맞은 네메쿠의 등이 찢기면서 불에 덴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렇게 퍼부어대는 감독관의 더러운 욕설은 카펫에서 아름다운 꽃들로 피어났다.”


‘페르시아’라는 옛 이름을 가진 나라 이란은 예전부터 (한국에선 ‘양탄자’라고도 부르는) ‘카펫’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카펫은 그 특유의 고상한 무늬만큼이나 처절한 아동노동으로 얼룩졌다. 이번에 소개하는 작품 『카펫을 짜는 아이들』은 ‘동화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이란의 자본주의적 카펫 산업에 ‘부품’으로 희생당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참고로, 이 책의 원작은 1975년에 나왔다).


이 작품은 카펫공장과 관련된 아이들의 두 가지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 첫 번째는 카펫공장에 팔려 간 소년 ‘네메쿠’ 이야기이며, 두 번째는 카펫공장에서 꿈을 잃은 사람들 - ‘라조우’, ‘아사도우’, ‘카이예’ - 이야기다.


첫 번째 이야기는 네메쿠의 아버지인 나무꾼 ‘야돌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마을의 권력자인 ‘대령’과 그 부하들에게 밉보이게 됐고, 이들은 급기야 야돌라가 ‘맘 자파’ 영감에게 빌린 당나귀에 불을 질렀다. 대령과 영감에게 보상해야 할 처지가 된 야돌라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사람들은 대령을 무서워했고 촌장도 대령의 편이었다. 보상할 돈이 없는 야돌라는 결국 아들인 네메쿠를 카펫공장에 보내게 된다.


네메쿠가 일하게 된 반지하의 카펫공장은 어두컴컴했다. 카펫에 아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쪼그려 앉아서 감독관의 명령에 따라 색색의 털실을 찾아 수놓고 있었다. 해가 진 뒤, 아이들은 공장 안 베틀 뒤에서 허접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여자들은 베틀 곁에서, 남자아이들은 삼베 자루 안에 들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목에 끈을 매어 자루에 묶인 채로 잠을 잤다. 네메쿠는 카펫공장에서 탈출을 시도하지만,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이 책의 두 번째 파트는 카펫공장에서 일하는 라조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성장기인 라조우에게 공장의 식사는 너무나 부족했다. 그는 배고픔에 못 이겨 정원에 있는 감독관의 석류나무 열매를 따 먹으려다 들키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감독관은 라조우에게 채찍질을 했고, 그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한 후에도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공장의 최고 숙련공이었던 아사도우는 감독관이 라조우를 심하게 채찍질하는 것에 반발해 그를 제지하려 했다. 이후 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고, 아사도우는 공장에서 일하지 못하게 된다.


카이예는 아사도우의 아내로, 그 또한 카펫공장에서 오래 일한 노동자였다. 카이예는 임신한 상태였는데, 어두운 공장에서 오랫동안 일한 탓에 눈이 어두워지고 허리가 굽어버렸다. 이뿐 아니라 카펫공장에서 일하던 여자아이들은 어린 나이부터 감독관과 그 가족에게 성폭력을 당하기도 했으며, 병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카이예의 출산일이 다가왔지만, 공장에서 쫓겨난 아사도우는 가족을 부양할 방법이 없었다. 아사도우는 어쩔 수 없이 감독관에게 돌아가서 용서를 구하지만, 다시 일자리를 구하는 데 실패한다. 카이예는 척추가 비뚤어졌기 때문에 정상적인 출산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출산 과정에서 그가 아이와 함께 세상을 뜨고, 아사도우가 절망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 비극적 이야기는 대략 1960년대 즈음 이란의 상황을 보면 더욱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이란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팔라비 왕조 하에서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질서에 편입되고 있었다. 팔라비 왕조는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미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고,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토지개혁이 이뤄지고, 미국산 농산물 수입과 함께 세계시장으로의 편입이 가속했다. 토지개혁의 결과, 이전의 지주-소작농 관계가 파괴됐다. 소작농은 일정한 토지를 분배받았지만, 이에 대한 세금과 부대비용을 감당하지 못해서 결국 땅을 팔고 노동자나 빈민이 됐다. 미국산 농산물 수입은 이 현상을 더욱 부추겼다. 이러한 ‘시초 축적’으로 생겨난 값싼 노동력은 낙후된 기술 수준과 만나, 카펫 같은 노동집약적 경공업으로 집중됐다. 그 속에서 노동자에 대한 초과 착취와 가혹한 인권 침해가 벌어졌다.


이 작품을 번역한 편집부는 ‘가난에 대한 연민’과 ‘지금의 삶에 만족하라’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지만, 역사적 배경을 따져보면 이 책의 결론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일들은 제국주의적 세계시장에 편입된 후발 국가들, 전()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에서 흔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에서와 같은 비극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이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역사적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같은 시기 남한에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의류산업이 발전했고, 똑같은 방식의 초과 착취와 인권 침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면서 외쳤던 요구들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역사적 맥락과 함께 이 책을 읽는 것은, 이러한 문제들의 기본 원인을, 자본주의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함이며, 그 해결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확인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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