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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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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ixabay]



성폭력 피해 보호를 

사회화해야 하는 이유

성폭력 수반하는 

자본주의 체제,

모든 성의 공동투쟁을 위해


정은희┃기관지위원회



‘사랑싸움’이 아니라

‘폭력’이다


한 여성과 남성이 실랑이를 벌이다 여성이 남성의 뺨을 때린다. 그러자 남성이 주먹으로 여성의 얼굴을 가격한 뒤 발로 차 내동댕이친다. 여성은 저항해보지만, 남성의 발길에 차여 쓰러진 뒤에는 일방적으로 맞을 뿐이다. 남성은 그런 여성의 위에 올라타 휴대폰으로 수차례 두들겨 패더니 일어나 계속해서 발길질을 한다. 여성은 의식을 잃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고, 남성은 그런 여성을 내버려 둔 채 휴대폰을 보면서 유유히 사라진다.


이 사건은 지난달 10일 부산의 어느 지하상가 CCTV에 찍힌 모습으로, 누군가 해당 영상을 SNS에 올리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그러나 기가 찬 이 사건의 레파토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언론은 이를 ‘쌍방의 폭행’이라 보도했고, 경찰은 여성을 때린 남성이 아니라 SNS에 이 영상을 게재한 사람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서글프게도 남성이 여성을 때린 이유는 휴대폰을 보여주지 않아서였다. 가장 이상한 일은 피해 여성이 사건을 신고한 이에게 취하를 부탁한 것이었다.


사실 이 같은 이른바 ‘사랑싸움’의 전개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많이 알려져 있듯 여성에 대한 폭력, 성폭력은 처음부터 ‘폭력’으로 규정되지 않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1 이 사회가 성폭력을 여전히 ‘개인적인 문제’ 또는 ‘사랑싸움’과 같은 ‘애정 표현’이나 ‘질투’, ‘애착’, ‘의처증’ 등 애정 관계에 원인이 있는 연애 행위의 연장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의 경우에도 ‘폭력’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드물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기에 소외돼 있거니와, 대개 일터 성폭력은 생사여탈권을 가진 상사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사건화하는 것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성 상품화의 가장 노골적 형태인 성매매에서의 폭력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폭력의 뿌리

: 여성에 대한 통제


그러나 성폭력은 ‘사랑 행위’의 연장이 아니라, 그것이 연애 관계에서든, 가족 관계에서든, 직장에서든 여성에게 종속적 지위를 강요하면서 통제하고 그의 성을 착취하려는 남성의 의도에 주요한 원인이 있다. 2016년 <한국여성의전화>가 수행한 “데이트폭력 피해 실태조사 결과와 과제” 연구에 따르면, 폭력 유형별 피해 경험 중 ‘통제 피해’를 경험한 비율이 여성 응답자의 62.6%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2 다른 유형의 폭력 피해를 경험했다고 말한 응답자 가운데 통제 피해를 경험한 비율을 분석했을 때, 모든 형태의 폭력 피해가 있는 여성 응답자의 90.1%가 통제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통제와 다른 유형의 폭력 간에 높은 상호연관성이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남성의 통제력은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성립된다. 여성의 성은 상품화되어 남성에게 구매되는 한편, 가정에서는 ‘현모양처’를 강요하며 이제는 경제력까지 기대하는 남성 가장3에 의해, 연애 관계에서는 더 나이가 많은 남성 ‘오빠’에 의해, 직장에서는 상급자 남성에 의해 통제된다. 즉, 자본가계급은 노동계급을 통제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듯이, 젠더폭력을 동원해 젠더 관계의 우위에 있는 남성이 약자인 여성을 통제하도록 한다. 나아가 자본가계급은 종교와 상업 미디어, 우파 단체 등 이데올로기 기구를 동원해 이 젠더폭력의 질서를 유지한다. 이때 문제의 책임은 늘 자본주의가 아니라 여성이나 성 소수자, 사회 비판자에게 쏠린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는 젠더폭력을 구조적으로 수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여성은 가정에서는 인간 생산과 사회 재생산의 도구로, 직장에서는 경제적 생산의 도구로 위치 지어질 뿐이다.4 자본주의와 함께 자유주의가 생겨났지만, 개인의 성과 인종, 사회적 관계는 부차화됐고, 나아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따라 성을 위계화하고 성별 분업을 구조화하면서 가정과 사회를 생산, 재생산해온 결과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이후 대중교육이 보편화하면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도 늘어났는데, 이는 남성의 지배에 대한 여성의 도전을 가속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관심사는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 폭력, 성폭력을 사회적으로 책임지고 해결하는 데 있지 않다. 대표적으로 페이스북의 최고 운영 책임자 세릴 샌드버그가 내세우는 “린인 페미니즘(Lean In, 자기계발 등 개인적인 발전을 중시하는 페미니즘)”처럼, 자본주의는 신분 상승이든 그 반대든 여전히 여성 개인에게 그 책임을 돌리며 구조적 차별과 폭력을 옹호‧은폐한다.



정부는 공적 책임을 

민간에 위탁


이렇듯 자본주의 국가에게서 온전한 성폭력 해결과 예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폭력에 대한 공적 지원도 열악하다. 한국에서는 여성가족부가 이런 문제의 주무 부처라고 하지만, 정부 내에서 여성가족부의 위상은 예산이나 지원 등 모든 면에서 형편없는 수준이다.5 여성가족부는 예산이 가장 적은 부처 중 하나이며, 코로나 팬데믹을 경과하면서 성폭력이 급증했는데도 이에 관한 내년 예산 증가분은 58억 원(대부분은 사이버 성폭력 대처 부문)에 그쳤을 뿐이다.


이러다 보니, 성폭력 피해 여성 지원 시설 등 공적으로 책임져야 할 영역이 대거 민간에 맡겨져 있다. 현재 여성가족부가 운영 중인 시설은 모두 1,735개소로, 이 가운데 여성 관련 시설이 158개소, 청소년 관련 시설 609개소, 가족 관련 시설 382개소, 그리고 권익 관련 시설이 586개소를 차지한다. 여기에서 마지막의 ‘권익’ 부문이 바로 젠더 폭력과 관련한 사업소를 말하는데, 이 시설은 <여성긴급전화 1366> 18개소, <해바라기센터>(가정폭력‧성폭력‧성매매 피해자와 가족에게 의료‧수사‧법률지원 제공) 39개소, 성폭력상담소 104개소, 가정폭력상담소 132개소, 성매매피해상담소 29개소, 청소년성문화센터 58개소, 피해자 보호시설(비공개시설) 199개소, 폭력피해 이주여성 상담소 등 7개소가 있을 뿐이다.


특히 여성가족부의 전신인 여성부는 2001년 김대중 정부 시절 설립되어 신자유주의 작은 정부 이데올로기 아래 처음부터 여러 시설의 민간위탁을 전제했다. 동시에 기층 여성운동의 노력으로 성폭력을 예방하는 제도들이 만들어졌지만, 지원 시설 민간위탁으로 인해 운영 부담은 각 단체에 맡겨졌고, 이와 더불어 운영도 단체 성격에 좌우되면서 논란이 계속됐다.


가령 모 종교단체가 수탁해 운영하던 <여성긴급전화1366> 울산센터는 2018년 1월부터 만 3년이 다 되도록 민간위탁 단체의 노조 탄압과 상급자의 성희롱 사건, 부실 운영 문제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1366 경기센터에선 지난 6월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발생했다. 전국 곳곳에 있는 1366센터의 경우만 보더라도 여성단체와는 무관한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시설이 55%에 이른다.


결국 여성에 대한 폭력, 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해선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이 절실하다. 더 이상 젠더폭력을 ‘사적 관계’나 개인에게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인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공적 개입과 지원 제도를 확대하고 이를 공공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여성의 피해 보호를 사회화하는 투쟁이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물론 이는 여성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성별 위계와 분업에 호출되는 남성 등 모든 성의 공동투쟁을 통해서 쟁취할 수 있는 과제일 것이다.



1 2019년 여성가족부가 수행한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연구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성폭력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 때문에 일어난다(52.3%)”, “성폭력 피해 신고자들 중에는 상대에 대한 분노나 보복심 때문에 성폭력을 거짓으로 신고하는 사람도 있다(39.9%)”, “남자는 성 충동이 일어나면 이를 통제하기 어렵다(36.2%)”, “여자들은 싫지 않을 때도 ‘싫다’고 말한다(32.7%)”라고 답했다.


2 이외에 ‘성적 폭력 피해’가 48.8%, ‘언어, 정서 및 경제적 폭력 피해’가 45.9%, ‘신체적 폭력 피해’가 18.5% 순으로 나타났다.


3 엥겔스는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즉 남성 지배를 보호하는 부르주아 법은 오직 유산자들을 위하고 프롤레타리아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에 대한 지위에는 아무런 효력도 갖지 못한다. 그의 경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개인적‧사회적 관계들이다. 또한 대공업으로 인해 여자가 가정에서 노동시장과 공장으로 나와 종종 가족의 부양자가 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가정에서의 남편의 지배는 그 마지막 잔재마저 존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런 일부일처제 이래 그칠 줄 모르는 아내 학대는 예외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김대웅 옮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두레, 122쪽.


“생명의 생산은, 즉 노동 속에서 자신의 생활을 생산하는 것뿐 아니라 생식으로 다른 생명을 생산하는 것은 이제 하나의 이중적 관계로서, 한편으로는 자연적 관계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관계로서 나타난다.”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김대웅 옮김), <독일 이데올로기>, 두레, 66쪽. 한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와 관련해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아내를 단순한 생산의 도구로만 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권화현 옮김), <공산당 선언>, 펭귄클래식, 250쪽.


5 여성가족부 2020년 예산은 도합 1조 1,264억 원이며, 피해 여성을 지원하는 예산은 1,228억 원에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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