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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의회냐 제헌의회냐

볼셰비키 이행전략에 대한 논쟁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백종성정책선전위원장


 


2월 혁명은 1차 대전의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대중은 평화를 원했으나, 부르주아 애국세력이 장악한 임시정부는 전쟁을 끝낼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 이에, 대중은 소비에트로의 권력 이양을 행동으로 촉구한다. 7, 준비되지 않은 봉기가 터진 것이다. 책임을 뒤집어쓴 것은 볼셰비키였다. 볼셰비키는 독일 첩자라는 비난과 함께 불법화됐고, 볼셰비키 축출에 성공한 임시정부는 대중집회 규제와 전선 사형제 부활을 통한 소비에트 억압에 이어, 우익의 희망 코르닐로프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총사령관은 민간 사형제 부활, 철도와 방위산업 군사화, 노동자 단체활동 금지 등에 이어 마침내 수도를 점령하고자 군대를 파견했다. 쿠데타였다.

노동자들은 모든 조치로 쿠데타를 막았다. 반혁명 군대가 보내는 전보의 차단, 철도를 따라 이동하는 군대의 규모와 목적지 파악, 쿠데타군 이동 선로의 폐쇄…. 수도 전역에서 경종이 울렸고 노동자들은 무장한 채 전투를 준비했다. 7월 봉기를 주도한 크론시타트 수병들이 다시 혁명의 수도를 지키고자 페트로그라드에 정박했다. 이제, 혁명 세력이 쿠데타 세력보다 강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반격을 앞장서서 조직한 주체가 볼셰비키였고, 이들은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831일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선거에서 볼셰비키가 최초로 다수를 확보했다. 리가, 모스크바 등 다른 도시도 페트로그라드의 뒤를 따랐다.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 10월 혁명은 이런 흐름의 연속선 위에 있었다.

 

제헌의회냐, 평의회냐

볼셰비키는 혁명 직후 난항에 직면했다. 10월 봉기 이전에 이미 제헌의회 선거가 예정되어있었고, 선거는 부르주아와 사회주의 세력의 연립정부 구성절차가 될 터였다. 결국, 1112일 진행된 제헌의회 선거 결과가 볼셰비키의 발목을 잡았다. 사회혁명당이 40%, 볼셰비키가 24%를 얻었다. 볼셰비키는 도시 노동계급에게서 압도적 다수를 얻었으나, 농촌에서는 사회혁명당이 다수였다. 농민은 러시아 인구 9할을 차지했고, 많은 농민들에게 수도의 혁명은 아직 체감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사회혁명당에게, 러시아 혁명은 어디까지나 토지개혁을 중심과제로 한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했다.

체르노프 등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볼셰비키의 슬로건을 되돌려 모든 권력을 제헌의회로라고 외쳤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라고 맞선다. 제헌의회에 소비에트 권력의 정당성 인정을 요구하는 최후통첩, <피착취근로인민의 권리선언> 의결을 요구한 것이다. 제헌의회는 이를 거부했고, 볼셰비키는 제헌의회를 해산한다. 191815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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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토지, 그리고 빵이 러시아 혁명대중의 요구였다. 문제는 이를 가능케 할 권력이었다. [출처 : getty images]



제헌의회가 존속했다면

볼셰비키가 제헌의회를 해산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은 무망하다. 역사에 가정은 없기 때문이라는 상투적 답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사회주의 공동정부 구성을 통한 혁명의 평화적 발전이 봉쇄된 결과가 바로 10월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상황을 보자. 9, 볼셰비키는 군사쿠데타를 함께 막아낸 사회주의 세력의 공동정부를 제안했다. 쿠데타와 연관된 자본가 임시정부 세력 배제, 사회주의자들만의 공동혁명정부 구성을 제안한 것이다. 쿠데타 분쇄 직후, 사회주의 공동정부를 통한 혁명의 평화적 발전이라는 낙관은 카메네프를 위시한 볼셰비키 우익은 물론, 레닌을 위시한 볼셰비키 좌익 역시 공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다시 부르주아와의 연립을 택한다. 이는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존속과 전쟁의 지속을 뜻했다. 그에 대한 볼셰비키의 대답이 바로 부르주아 임시정부 분쇄, 10월 혁명이었다.

결국, ‘제헌의회가 폐쇄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은 191710월 봉기가 발생한 이유 자체를 망각한 것이다. 191710월 봉기는 이미 빵·토지·평화라는 임무를 실현할 소비에트로 권력을 이양했다. ,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 제헌의회는 그 존재 자체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부정이었다. 제헌의회의 운명은, 19179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사회주의 공동정부라는 제안을 거부하고 부르주아와의 연대를 택한 순간 결정된 것이었다. <제헌의회냐, 소비에트냐>의 선택은 <부르주아 혁명이냐, 사회주의 혁명이냐>의 선택과 같았다. 문제는 제헌의회-부르주아 혁명의 길이 무엇보다 1차 대전의 지속을 뜻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10월 봉기는 권력을 독점하고자 한 볼셰비키의 쿠데타가 아니다. 이는 전쟁을 끝낼 소비에트 자치권력의 점진적 발전전망을 상실한 볼셰비키의 불가피한 선택에 가깝다. 사회주의 공동정부 구상이 파산한 9월 중순 이후, 봉기에 대한 레닌의 독촉은 권력을 독식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의 평화적 전망이 모두 사라진 현실에 근거했을 뿐이다. “소비에트 민주주의체제 하에서 소비에트에 권력이 집중되었다면 무장봉기는 필요 없었을 것이며, 정당 간 권력 이양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어느 평화주의자의 말이 아니라, 봉기의 군사지도자 트로츠키의 말이다. ‘제헌의회가 유지되었다면이라는 가정보다는 이미 제헌의회 선거가 무의미해졌음을 볼셰비키가 명확히 했다면이라는 가정이 훨씬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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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힘이 이행의 원동력이다. 사진은 2015년 그리스 긴축반대 시위.



혁명은 결국 단절이다

혁명은 구체제와의 단절이다. 생산관계를 그대로 둔 채 점진적 개혁을 확대해 착취체제를 끝낸다는 전망이 실현된 적은 안타깝게도 없다.

1970년부터 73, 칠레 인민연합 정부의 비극이 대표적이다. 인민연합정부는 출범부터 의회제도를 비롯한 기존질서 유지를 보장법으로 약속했다. 현존 정치·사법체제, 교육제도·노동조합·사회조직의 사회주의 지향으로부터의 독립, 출판과 대중매체의 국가개입으로부터의 독립 등을 서약했음에도 인민연합의 적은 쿠데타를 택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아옌데 정부가 실제로 자치권력(코르돈, 산업통제위원회)을 계속 억눌렀다는 것이다. 1971년부터 아옌데는 노동자들의 생산시설 접수를 극좌주의라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19736월 군의 쿠데타 시도에, 칠레 산업통제위원회는 공장을 접수하고 생산을 통제했으며 운송도구와 물자를 징발했다. 그러나 아옌데 정부는 사회화된 기업을 다시 자본가들에게 반환하고 군부를 정부에 끌어들여 문제를 봉합하려 했다. 군부의 위협에 피노체트 장군을 내무장관으로 입각시켜 위기를 봉합하려한 것은 바로 아옌데 자신이었다. 필요한 것은 대대적 숙군과 인민권력 강화였음에도 말이다.

단지 먼 과거의 일뿐만이 아니다. 20151, 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IMF의 그리스 긴축정책 강요에 맞선 캠페인으로 권력을 장악했으나 6개월 뒤 그 자신이 가혹한 긴축정책의 집행자가 된 시리자의 파국은,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단절적 계기와 고통스러운 선택은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시리자의 일원이었던 코스타스 라파비차스와 스타시스 쿠벨라키스조차 시리자는 유로존 탈퇴라는 고통스러운 선택 없이 상황을 진전시키려 했다고 지적하듯 말이다. 시리자의 긴축거부는 이중권력을 야기했을까? 이번에도 가정은 무망하다. 그들은 애초 단호한 긴축거부 결단이 필요한 순간을 국민투표로 우회했다. 압도적 긴축거부 투표로 다시 한번 무기를 쥐여준 민중을, 혹독한 긴축의 수용으로 끝내 배신했다. 시리자의 이론적 지주, 니코스 풀란차스에 맞서 앙리 웨버가 벌인 논쟁은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시사적이다.


니코스 풀란차스: 그람시도 10월 혁명의 근본적 골간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앙리 웨버: 그렇다.

니코스 풀란차스: 그람시가 진지전으로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진지전은 국가의 강한 성채를 민중권력의 골조로 둘러싸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같다. 그람시에게 국가는 강한 성채. 당신은 그 성채를 공격하던지(기동전), 성채를 포위하는 것이다(진지전). 그러나 결국 같은 이야기다. 그람시 저작 어디에도 국가기구 특정 지점에서 일어날 수 있는 내부투쟁과 연관된 파열의 개념은 없다. 그런 개념은 그람시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히 국가의 발전으로 인해, 즉 국가의 힘으로 인해, 국가와 사회 모든 영역이 통합된 현실로 인해 파열은 국가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의 약점이다.

앙리 웨버: 대화의 난점은 어떤 파열인가에 있다. 파열의 본질은 무엇이며 정도는 어디까지인가? 위기가 터지기 이전, 혹은 위기 도중에 국가 내부 진지들이 균열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상대적으로 부차적 진지들이다. 권력의 실체가 집중된 가장 중요한 국가기구는 혁명의 편으로 이동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혁명적 대중운동이 국가장치의 핵심 부문을 분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 예를 들면 관료 다수를 당신은 실제로 국가가 중립적일 수 있다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당신은 국가기구와 그 지도적 인물들의 성격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풀란차스는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제도적 이행전략, 즉 유로코뮤니즘은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결전을 잠시 지연시킬 수 있을지언정, 우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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