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변혁정치

> 변혁정치

전노협 건설로 가는 길

연대 세력 집결을 위한 세계노동절 기념대회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노동자들은 전국조직 건설을 위해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맞선 투쟁을 전개하였고, 조직 건설의 필요성을 조합원들에게 알리고 다양한 행사를 통해 결의를 다졌다. 또한 노동자와 더불어 학생, 교수, 문화예술인, 민주세력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노동자 연대를 중심에 둔 노동절 기념대회

이는 1989년 세계노동절 100주년을 맞아 열린 기념대회에서도 드러난다. 대회를 주최한 전국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투쟁본부는 대회의 목표를, 첫째 전노협 건설의 실질적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 둘째 노동자 대중과 민중들의 연대의식을 제고시키는 획기적 전기, 셋째 노태우 정권의 노동운동탄압 음모를 저지하는 투쟁으로 설정했다. 특히 이 대회는 연대를 강조해 각 세력의 주특기를 살려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추진하고 그 속에서 노동자가 올바른 민중연대 의식을 갖춰 한국사회의 진정한 주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도록한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4.30 노동절 기념대회는 여의도로 공지되었지만 노동자들은 연세대로 모였다. 어김없이 원천봉쇄였다. 28일부터 갑호 비상이 걸렸고 경찰 2만 명이 동원되어 연세대를 둘러쌌다. 연세대 학생들, 먼저 진입한 학생들은 교문 앞에서 전경과 대치하며 병력을 이동하게 해 노동자들이 진입할 수 있게 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산을 넘어 연세대로 진입했다. 연세대로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서강대에 600여 명, 한양대에 300여 명, 동국대에 2천여 명이 집결했다. 이는 투쟁이 서울 전역으로 확산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당시는 어디에 모이든 즉각 현장을 지휘할 팀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연세대에서도 모이는 대로 참가조직, 학생대표자들이 연석회의를 열어 대표자를 선임하였고 전야제 프로그램을 그 자리에서 확정했다. 전야제 집회가 끝나고 마지막에는 전체 토론 시간이 배치되었다.

430일 대회는 무산되었지만 노동절 투쟁은 서울 시내 곳곳에서 벌어졌다. 연세대 앞에서는 가두로 진출하려는 노동자학생과 전경이 5시간 동안 격렬하게 대치했다. 서강대에서도 동시에 신촌로터리로 진출하려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연세대로 들어가지 못한 학생과 노동자들이 아현동로터리에서 공안합수부 해체를 외치며 투쟁했고 서울역, 남대문, 서부역, 신세계, 명동성당, 을지로 등 곳곳에서 밤늦게까지 시위가 이어졌다.

신문은 경찰의 다연발탄과 학생·노동자들의 화염병이 공중에서 동시에 맞교환되기도 해 한때 하늘 전체가 화염병으로 가득차기도했다고 보도했다(경향신문 1989.5.1.). 병원 노동자들은 학생회관에 임시진료실을 차려 부상자를 치료했다. 이날 투쟁으로 2,900명이 연행되었다.

 

노동자는 파업으로! 학생은 동맹휴업으로!

‘4.30메이데이 집회에 학생들은 동맹휴업으로 노학연대를 실현했다. 학생운동진영은 427일부터 51일까지 동맹휴업기간으로 정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기로 결의했다. 서울의 12개 대학, 경상도의 14개 대학이 동맹휴업을 결의했다. 서울대의 경우 106개 학과 중 93개 학과가 동맹휴업했고 실제 58.7%의 학생이 수업에 불참했다.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제주대 등 전국 30개 대학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 주최로 노동절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학생회 간부들은 강의실을 돌며 노동자 투쟁에 연대해야 하는 이유를 선전하고 다녔고 학생들은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물가 문제, 등록금 문제가 다르지 않으며 노동자의 요구가 관철되는 것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80년대 운동진영 내에서는 대안 사회 구성과 이를 위한 과학적 방법론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사회성격 논쟁, 계급분석, 변혁을 위한 전략과 전술, 조직노선과 정치노선 논의 등이다. 그 기반은 마르크스주의였다. 이는 학생운동진영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것은 일부 대학과 대학생에 제한된 것으로 학생운동이 10년도 못 가 쇠락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는 평가도 있지만, 당시 노학연대라는 것이 관념적인 수준에 머문 것만은 아니었다. 메이데이 동맹휴업에서뿐 아니라 그해 겨울 각 대학 총학생회장 선거에는 노학연대를 제시하며 전노협 건설에 동참하는 학생회를 공약으로 내건 후보들이 다수 출마했고 당선되는 경우가 많았다. <세계를 변혁하라>가 학생회 선거운동가로 등장하기도 했으니. 사회 변혁에 대한 열망, 변혁적 세력과의 연대 실현을 위한 생각이나 실천이 모두 같을 수는 없었겠으나, 자본과 정권의 탄압을 뚫고 노동자가 사회 변화의 주체로 서고 있음은 알았던 것이다.


56-이땅노동운동사01.JPG

서울대학교 동맹휴업 결의 상황판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경향신문 1989년 4월 29일자 기사

56-이땅노동운동사02.JPG



© k2s0o1d6e0s8i2g7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