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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회사 전환

총수일가 지배권을 강화시킨다

 

이주용정책선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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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20일 국내 4위 재벌 LG그룹 구본무 회장이 사망하자 정치권과 재계는 앞다투어 추모메시지를 보냈다. 최근 잇따라 불거진 재벌 갑질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고, IMF 위기 직후 일찌감치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는 등 정도경영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정부여당 주요 인사들이 추모대열에 앞장섰다. 문재인 대통령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을 보내 조문하는 한편 이낙연 국무총리,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김경수 민주당 경남도지사 후보도 구본무 회장과의 인연을 언급하며 추모글을 게시했다. 언론은 성향을 막론하고 모범적인 기업인의 모습을 보여줬다‘LG는 여타 재벌들과 달랐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과연 LG는 달랐을까? 공정거래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구본무 회장은 1.29%에 불과한 지분으로 자산총액 123조 원에 달하는 LG그룹을 지배했다.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지 않은 현대자동차그룹의 총수(정몽구)지분 1.74%보다도 작다. 나아가 LG3대 세습을 넘어 총수일가 4세 승계를 완성하고 있다. 구본무 회장 사망 3일 전, 그룹 지주회사인 ()LG는 이사회를 열어 구본무 회장의 외아들 구광모 LG전자 상무를 지주회사 등기이사로 추천했고 629일 임시주주총회에서 최종 의결할 예정이다. 이로써 경영권 4세 승계를 확정 짓겠다는 것이다.
정도경영을 내세운 지주회사체제의 LG그룹에서는 범죄행위가 없었을까? 당장 지난 59일만 해도 검찰은 총수일가가 100억 원 대의 주식양도세를 탈루했다는 혐의로 LG그룹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LG는 국정농단 사건에서 미르K스포츠재단에 80억 원에 달하는 출연금을 제공했고, 2002년 대선에서는 일명 차떼기수법으로 한나라당에 150억 원의 불법선거자금을 트럭째 건넸다. 2002년에도, 2016년에도 구본무 회장은 LG그룹의 총수였지만 어떤 처벌도 없었고 검찰의 기소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LG정도경영은 노동자들과는 관련이 없었다. 1년 전인 20171, LG유플러스 콜센터에서 일하던 현장실습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벌어졌다. 2014년에도 같은 부서의 노동자가 목숨을 끊었다. 고인들은 해지방어부서에 배치되어 서비스를 해지하려는 고객들을 상대로 극심한 감정노동에 시달렸고, 가혹한 실적 압박을 받으면서 지정된 콜 수를 채우지 못하면 퇴근할 수도 없었다. 작년 7월에는 LG화학에서 임단협 교섭 도중 사측이 노조에 불법도청장치를 설치했다가 노동조합 간부들이 이를 발견한 사건도 터졌다. 9월에는 LG생활건강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에 나섰다. 면세점 판매직으로 일하던 LG생활건강 여성노동자들은 관리자들의 성적 비하발언에 시달리며 육아휴직조차 사실상 금지당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지주회사 전환, 정말 재벌을 개혁하는가?


문재인 정부는 재벌개혁의 핵심과제로 지배구조 개편을 내세웠다. 계열사 간 복잡하게 얽힌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 총수일가의 전횡을 막고 투명한 지배구조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보기에 이 지배구조 개편의 모범적인 사례가 바로 LG그룹이었다. 현 정부의 재벌개혁을 상징하는 공정거래위원회 김상조 위원장은 지난해 취임 후 얼마 안 되어 가진 인터뷰에서 시민단체 활동 때부터 지배구조 차원에서 가장 모범적인 곳은 LG그룹이라고 얘기해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서 확인했듯 지주회사체제의 LG그룹 역시 1%대 지분만으로 총수가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그 권력을 세습한다. LG가 정치자금 제공과 노동탄압처럼 전형적인 재벌범죄에서 예외인 것도 아니다.
지주회사체제로의 개편은 얼핏 보면 계열사들끼리 꼬리를 물고 있는 순환출자보다 단순하고 투명한 지배구조를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총수일가의 지배권을 제한하고 전횡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그 지배권을 더 안정화시킨다.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할 경우 총수일가는 지주사 지분만 장악하면 손쉽게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벌개혁론자들이 순환출자를 비판했던 이유 중 하나는 총수일가가 보유한 지분은 극히 작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된 계열사 지분을 활용해 거대한 기업집단 전체를 사유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주회사체제는 다른가? 마찬가지다. 총수일가는 지주사 지분만 어느 정도 보유하면서 그 지주사가 거느린 자회사, 그 자회사들이 보유한 손자회사 등등을 모두 지배한다. 순환출자와 방식만 다를 뿐 총수일가의 권력은 공고하게 유지된다.
이 때문에 구본무 회장 지분은 1.29%에 불과했지만 LG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었다. LG뿐만이 아니다. LG보다 한 단계 위인 국내 3위 재벌 SK그룹은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한 지 10년이 지났다. 그런데 총수인 최태원 회장의 지분은 0.03%, 일가친족 지분을 합해도 0.32%에 불과해 1%가 채 되지 않으며 10대 재벌 중 총수와 일가 지분율이 가장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태원 회장이 SK그룹에서 군림하는 것은 지주사인 ()SK 지분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주사 SK가 십수 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각각의 자회사들이 또 여러 손자회사를 두고 있다. 이로써 최태원 회장은 자신의 지분은 불과 0.03%에 불과하지만 무려 59.35%에 달하는 계열사 지분을 활용해 자산총액 190조 원의 SK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총수일가 지배권 지켜주는 정부의 재벌개혁


지주회사체제로의 지배구조 개편이 총수일가의 전횡조차 막을 수 없음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 바로 대한항공 조씨 일가 사태다. 대한항공이 속한 한진그룹은 자산규모 약 30조 원의 국내 13위권 재벌로서, 2013년 지주회사 재편작업을 시작해 2015년 무렵에는 지배구조 개편을 완료했다. 한진그룹 역시 마찬가지로 총수인 조양호 회장의 지분은 2.51%, 일가친족 지분을 모두 합쳐도 3.62% 정도이지만 50.97%에 달하는 계열사 지분을 활용해 총수일가 지배권을 유지하고 있다. 조씨 일가는 그룹 지주사인 한진칼 지분을 보유함으로써 대한항공을 비롯한 계열사들까지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진그룹 총수일가는 밀수탈세, 노동자에 대한 폭언폭행 등 경악할 범죄행각을 저질렀다.
지난 510일 공정거래위원회 김상조 위원장은 10대 재벌 경영진과 간담회를 열었다. 주요 의제는 지배구조 개편방안이었고, 김상조 위원장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지배구조 개편과정에서 재벌들의 애로사항을 경청하고 정부와 재계가 지속가능한 지배구조를 위해 어떤 측면에서 함께 노력해야 하는지 논의하는 자리로 마련했다. 이 간담회 얼마 전인 4월 말에 공정위는 대기업집단에서 지난 1년간 순환출자 85%를 해소했다며 순환출자가 대기업집단의 소유지배구조에서 차지하던 역할과 비중도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고 만족스럽게 평가했다.
그러나 순환출자를 해소하고 지주회사로 전환했다고 해서 총수일가 지배권이 약화되지도,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510일 공정위-재벌 간담회에서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불법파견 범죄자 정몽구를 구속하라고 항의시위를 하다가 제지당하고 쫓겨났다. 그러고서는 간담회 이후 김상조 위원장은 시민단체들의 재벌개혁 요구가 너무 경직돼 있다앞으로는 시민단체들을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총수일가의 지배권을 지켜주는 데 재벌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기만이다. 나아가 정부는 이조차 부담스러운지, 이제 슬슬 발을 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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