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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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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하지 않는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붉게 노을이 비친 비행장이다. 비행장에 이르는 굽이굽이 길에 사람들이 비행장을 향해 걸어와 줄을 지어 비행기를 탄다. 노을 진 하늘 위로는 자막이 나타난다. 임시계약직, 파견, 용역, 도급, 사내하청, 촉탁직,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학습지교사, 보험모집원, 건설일용직, 레미콘기사, 골프장 캐리, 텔레마케더.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비행기 주인인 자본가가 나타난다.

 

한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산다는 것은

등장인물이 소개된다. 자본가, 비정규직1, 비정규직2, 그리고 누군지 모르는 터프하게 생긴 남자. 비행기가 뜨자마자 자본가는 비행기 계기판으로 표현된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 필요 없는 노동자들을 비행기에서 밀어낸다. 노동자들은 살려달라”, “낙하산을 달라고 애원하지만 자본가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밀어버린다. 떨어지는 노동자가 비행기에서 삐져나온 밧줄을 잡아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이 모습을 보던 자본가가 차별 해고라고 쓰여진 칼로 밧줄을 끊는다. 노동자는 비명을 지르며 바다로 떨어진다. 검푸른 바다 위로 주검 대신에 핏빛 글자가 떠오른다. ‘비정규직비행기 계기판의 돈 올라가는 소리가 나고 자본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린다.

또 다시 같은 등장인물이 소개된다. 자본가, 비정규직1, 비정규직2, 그리고 누군지 모르는 터프하게 생긴 남자. 또 다시 비정규직을 실은 비행기가 높게 날고 있다. 또 다시 자본가는 낙하산 없이 노동자를 비행기 아래로 밀어내려 한다. 이때 터프하게 생긴 남자가 나타나 자본가에 맞서 싸운다. 자본가와 싸운 끝에 낙하산을 빼앗아 밀려나는 노동자에게 준다. 떨어지는 노동자의 낙하산이 펴진다. ‘노동조합이라 쓰여진 낙하산이다. 노동자는 살았다라고 안도한다. 터프한 남자가 민주노총이라고 쓰여진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면서 노동자의 손을 잡는다. 노동자를 바다에 떠 있는 민주노총이라는 배 위에 무사히 안착시킨다. 배 위에는 노동조합이라는 낙하산을 타고 민주노총이라는 배 위에 이미 내려 온 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자막이 나온다. ‘한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산다는 것은 노동조합이라는 낙하산을 가져야 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민주노총의 광고, <한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산다는 것은>의 내용이다. 4분짜리 영상이다. 우리가 만든 것 중에 그때까지 가장 짧은 작업이었다.

 

실사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물론, 이 작품은 실사화면이 아니다. 플래시라는 이름의 2D 컴퓨터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를 이용해서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플래시로 하면 상당히 쉽게 애니메이션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솔깃해서, 시작했다. 그러나 짧은 광고 컨셉의 대본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후회가 들기 시작하더니 우여곡절 끝에 작업이 끝났을 때는 작업에 관여한 우리 모두에게 다시는 하고 싶지 않는 작업이 됐다.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화면을 만드는 일은 촬영으로 화면을 만드는 것보다 백배는 힘들었다. 그러나 내용이나 플래시라는 방식이 어떠하든, 인물과 배경을 그리고, 그것에 색을 입힌 만화가의 능력으로 빚어낸 화면들 하나하나가 너무 아름다웠다. 그것에 못 미치는 우리의 대본에는 아까울 정도였다.

교육물 작업이 점점 많아지면서 우리는 촬영으로 만들어진 실사 화면만으로는 내용을 정확하고 쉽게 전달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 원하는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화가들에게 그림을 요청해서 만들어 내기도 하고, 맞는 만화나 그림 이미지를 찾아서 가져다 쓰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우리는 우리 작업을 위해 그림을 그려줄 마음씨 좋은 만화가를 만났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가 아니면 할 수 없었던 많은 작업들을 했다. 그의 그림은 만화적이면서도 회화적이었다. 만화적인 풍자와 비판의 이미지를 정확히 잡아내면서도 회화적인 향기를 느끼게 하는 그림들이었다. 그가 서울을 떠나 가족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갈 때까지 10여 년간 우리는 함께 일했다. 함께 일하는 동안 그는 우리에게 항상 과분했다. 행운이었다. 그 행운이 사라지고 난 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만화로 화면을 구성하거나 플래시 애니메이션 같은 시도들 말이다.

 

* <한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 20043/4/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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