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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해체와 노동자 정치운동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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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16일 열린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 발족 기자회견 [출저: 노동자역사 한내]



1990년대 초 민중운동진영의 정치적 흐름을 기본적으로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보수야당과의 민주대연합, 재야 입당파, 독자적 합법 진보정당 운동이다.

 

소련 해체와 합법 정당 운동의 시대

독자적 합법 진보정당 운동 흐름은 1991년 소련 해체를 계기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련 해체는 운동진영에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당시 운동의 양대 진영이라 불리던 NLPD PD진영이 더 큰 타격을 받았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념을 받아들여 소비에트 혁명을 모델로 사회주의 지하 전위정당을 지향하던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모임마다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혁명적 노동운동에 대한 회의, 마르크스주의 위기 논쟁, 전위 정치활동의 한계가 거론되었고 노동자 정치운동의 변화가 모색되었다.

김문수가 쓴 글에 의하면 일천 명이 넘는 비공개, 비밀활동가들이... 합법공간으로 솟아올라왔다. “전위적 정치활동이 막을 내리고 합법적 정당 활동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한 한 정치운동 그룹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왔다. 198910월 인민노련 조직사건으로 구속되어, 법정에서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라며 시종일관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이들이었다. 한편에는 합법 대중정당 운동의 개량화를 경고하고 전위를 이어가며 전술로서의 대중정당을 위치 지었던 그룹도 있었고, 정치적 투쟁전선 강화로 노동자 독자정당 건설 역량 강화를 이루자는 그룹도 있었다.

이 시기 아예 운동을 떠나는 이들도 많았다. 현장으로 들어간 학출 노동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때부터 1992년 민중당 해체 시기까지 노동현장을 떠났다. 취업을 하거나 사법시험을 준비하러 신림동으로 가는 이들이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지도선이 사라지는 모임들이 생겨났다.

 

전노협을 비롯한 노동조합 활동가들 사이에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둘러싸고 본격적인 논란이 시작된 것은 19906월 민중당 창당발기인 대회와 19911215일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한국노동당창당추진위원회) 결성 즈음이었다. 민중당 창당발기인 1,143명 중 500여 명이 노동자였다. 노정추 발족 당시에는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선진활동가, 단위사업장의 노조 간부들이 대거 참여했다. 민중당에 참여한 노동자는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가 대부분이었고 노정추에 참여한 이들은 노조 직책 없이 개인자격으로 참여했다. 한노당은 대중의 광범한 투쟁보다는 선거 득표율을 기반으로 정치세력화를 이루려는 민중당의 재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어쨌든 선거참여와 정당운동을 중심에 두기 시작한 노동자가 양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합법 정당운동 노선의 정치적 실험은 민주노동당 창당까지 이어졌다.

한편 탄압에 맞선 투쟁을 전개하느라 조직이 훼손된 전노협은 정당운동을 둘러싼 논쟁으로 선진활동가들 간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분열과 이탈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과적으로 조직력이 더 약화되었다.

 

노동자 정치운동과 노동조합

당시 필자는 이론적으로 논쟁할 능력이 안 돼, “소련이 자본주의의 대안이었느냐”, “소련이 해체되었다고 자본주의가 승리한 거냐”, “노동자 현실이 바뀐 게 있냐며 운동을 정리하는 이들에게 호소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당시 노동운동진영의 고민과 논쟁은 정치적 노동운동으로부터 구별·정립해가는 민주노조운동진영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데 집중되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90년대 초 노동현장의 선진노동자에 대한 정치적 노동운동의 영향력은 전점 약화되고 있었던 반면, 대중조직 지도부와 조합원 간의 구속력은 강해지고 있던 시기였다. 1987년 이후 투쟁을 통해 대규모 사업장을 중심으로 절대적 저임금이 해소되고 실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반면 자본은 노동자 교육에 인력과 재정을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의식과 행동을 변화시켜 자발적으로 노동자들을 기업 내로 포섭하려 했다. 기업교육은 기업 이념 전파를 넘어 교양, 기술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졌고, 노동자뿐 아니라 그 가족과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30분 일 더하기 운동‘10% 절약 운동’, ‘5대 더하기 운동등이 현장에 강요되었다. 물리력보다 더 위협적인 경쟁이 현장을 통제하게 되었다. 노동자 문화가 무의식 중에 바뀌어갔다.

노동현장에서는 소련 해체 때문이 아니라 탄압과 구속과 해고를 견디다 못한 사람들, 돈과 안락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사람들이 노동운동을 떠났다. 노동자들은 정치적 실천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노동조합운동은 성장·발전하고 있지만 노동운동의 정치화는 그만큼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자 정당운동도 뒷걸음질이거나 잘 해야 제자리걸음이다. 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주의 정치 구성은 더 멀고 험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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