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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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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07.02 17:27

2019년 4월 10일

하나의 우주가 또 사라졌다


박세연┃경기



특성화고를 졸업한 김태규 씨는 원래 수원의 삼성전자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약 기간이 끝나서 일자리를 잃게 되자, 그는 수원의 신축공사 현장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불과 3일 뒤, 그는 현장의 5층 화물용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졌다. 일을 시작하면서 안전교육도 받지 못했고, 안전모나 안전화, 안전벨트 같은 기본적인 장비조차 지급받지 못했다. 처음 계약할 때는 돌이나 벽돌을 쌓아 올리는 조적 작업자로 현장에 투입됐지만, 실제로는 해본 적도 없는 건설폐기물 나르는 일을 하게 됐다. 그는 추락할 당시 현장에 굴러다니던 안전모를 주워서 쓰고 있었고, 안전화가 아닌 자신의 낡은 검은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물론 안전망은 없었다. 그렇게 그 청년노동자 자신에게는 온전한 하나의 우주였던 목숨을 잃었다. 올해 나이 25살이었다.



‘죽은 사람 잘못’이라는 사측과 수사당국


그가 떨어진 화물용 엘리베이터는 사용승인도 받지 않았고, 양쪽 문이 모두 열려 있었다. 당시 현장에 함께 있던 목격자들의 진술은 엇갈렸고 사고 이후 작업 중지 처분이 내려졌지만, 며칠 후 엘리베이터는 5층에서 1층으로 내려져 있었다. 사고 현장은 훼손됐다. 유족들은 김태규 씨가 왜 떨어졌는지 정확한 진상을 알고 싶어 했지만, 경찰은 사건을 ‘단순실족사’로 결론 내고 유족도 모르는 사이에 검찰로 송치했다. ‘김태규 씨의 실수’라는 것이다. 회사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유족들은 회사나 경찰, 검찰을 믿을 수 없었다. 김태규 씨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해 유족과 김태규 씨의 친구들이 직접 나섰다. 경기고용노동지청을 찾아가고, 고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인 김미숙 씨 등 산재사고 피해자 가족들을 만났다. 기자회견을 하고, 지역의 노동조합을 찾았다. 이렇게 유족들이 노력한 결과 경기 지역에서 “청년 건설노동자 故 김태규 님 산재 사망 대책위”가 꾸려졌다. 사건 이후 한 달도 훨씬 넘어서의 일이다. 늦었지만 민주노총 경기도본부를 비롯한 노동조합들과 시민사회단체, 정당들은 이 사건이 김태규 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일터에서 죽어 나가는 제도적 살인의 문제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자본이 저지르는 살인의 행렬


김태규 씨 사망 사건은 명백한 산업재해다. 현장에는 기본적인 안전장치도 마련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그가 4월 10일 아침 8시에 떨어져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날, 다른 누군가 사고를 당해도 이상할 게 없는 조건이었다. 김태규 씨가 운이 나빠서, 실수를 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3년 전 서울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에 끼어 죽은 김군, 2017년 제주의 음료 공장에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프레스에 깔려 죽은 이민호. 작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설비작업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김용균처럼, 이윤을 위해서는 노동자의 안전이나 생명 따위는 나 몰라라 하는 자본에 의해 김태규는 죽어 나간 것이다.


최근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산재 사망자 중 40%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고 김용균 사망 사건을 계기로 ‘위험의 위주화를 중단하라’는 투쟁이 거세지면서 산업안전보건법이 28년 만에 개정됐지만, 정작 김용균의 동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적용받을 수 없어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 돼 버렸다. 게다가 노동부가 입법 예고한 하위법령은 적용 범위를 더 축소하고 원청 책임도 후퇴시켜 이조차 누더기로 만들었다. 이런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죽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반복되는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원청 기업 총수와 경영 책임자 등 자본에게 산재 발생의 책임을 엄중히 묻고 처벌해야 한다.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제정이 꼭 필요한 이유다. 산재로 노동자가 죽어 기업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지금처럼 벌금 몇백만 원으로 끝난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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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태규 님의 유품으로 남은 옷과 운동화. 고인의 누나 김도연 씨 제공]



죽음의 빚을 갚기 위해


김태규 씨 누나인 김도연 씨는 산재 피해 가족들의 모임인 “다시는”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모임은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이 돌아올 수는 없지만,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김도연 씨는 동생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를 만났고, 고 이민호의 부모님도 만났다. 그러면서 더 큰 문제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태규의 재수사에만 집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산업안전보건법의 구조적인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김용균법 하위법령의 재개정과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을 제정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 그 이유다”라고 한다.


다가오는 7월 5일, 수원역 광장에서 김태규 씨를 추모하는 문화제가 열린다. 수원 토박이 김태규 씨 가족이, 그의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갖고 싶다는 소망으로 마련한 추모제다. 우리가 요구하는 모든 것들이 이뤄진다고 해도 태규 씨가 가족들 곁으로 돌아오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이, 그리고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이 일터에서 계속해서 죽어 나가는 일은 막아야 한다. 우리는 수많은 김태규 씨들의 죽음에 빚지며 살고 있다. 이제 그 빚들을 갚아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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