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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자본주의 구한 

좌파가 주는 교훈


정은희┃민중언론 참세상‧워커스



지난해 7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사상 최악의 산불로 103명이 목숨을 잃었다. 끔찍한 참사에 정부의 책임을 묻는 소송까지 잇따랐다. 그러나 도마 위에 오른 건 당시 시리자(“급진좌파연합”) 정부의 위기대처뿐만이 아니었다. 소방을 포함한 인프라 비용 삭감 등 그간의 긴축 정책도 비극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2016년부터 그리스 국가재정은 독일보다 더 높은 흑자를 기록했지만, 시리자 정부가 긴축을 지속하면서 그리스인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그로부터 1년이 흐른 지난 7일 총선에서 시리자는 쓰디쓴 고배를 마셔야 했다.


사실 시리자의 패배는 예상된 일이다. 시리자는 지난 2010년 그리스 경제위기를 거쳐 계급투쟁이 고조할 때 함께 부상해 집권까지 성공했지만, 이후 우향우 행보를 거듭하며 그리스 민중의 실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패배는 시리자의 패배이면서 동시에 그리스 좌파의 패배이기도 하다. 나아가, 지난 10년간 세계공황을 경험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고전하고 있는 좌파 모두에게 쓴 메시지가 되고 있다.



유럽 자본가계급에 끌려간 시리자


물론 시리자의 패배는 우선 유럽연합EU과 IMF 등 국제채권단에 그 책임이 있다. 금융자본을 대변하는 국제채권단은 유독 그리스에 공격적이었다. 세계 경제위기에 좌파적 대안을 말하며 부상한 시리자가 그들에게는 ‘모난 돌’이었다. 이를테면, 지난 2015년 유럽중앙은행ECB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 금융 유동성을 공급하면서도 그리스에 대해선 가혹한 양해각서를 내밀었다. 결과적으로 시리자 정부가 이에 굴복한 결과, 지난해 8월 그리스는 구제금융 체제를 종료했지만, 민중의 삶은 더욱 악화했다. 그리스 국내총생산GDP은 2008년보다 38% 감소했고, 평균 월급도 3분의 1가량 줄었다. 실업률은 20%를 넘보고 있으며, 25세 미만 청년실업률은 40%로 여전히 심각하다. 그리스 민중에게 자본주의의 위기를 전가하고 체제를 지키려 했던 유럽 자본가계급에 시리자가 끌려간 셈이다.


시리자 정부 스스로도 패배에 책임이 있는 당사자다. 애초 시리자는 긴축 반대를 내걸고 집권했지만, 이후 돌변했다. 공약을 현실화할 전략도, 대중적 계급운동과의 연계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리자 정부의 총리 치프라스는 국제채권단을 필두로 한 유럽연합의 과두 체제가 주요 문제라고 보면서도, 정작 그들과의 싸움을 회피했다.


무엇보다 시리자가 부상한 시기는 2010년 위기조치 아래 가혹한 노동유연화를 시행하던 때였는데, 시리자 정부는 후퇴한 노동권이나 기층운동 복원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내적으로는 연금 삭감과 민영화를 강제하며 계급운동의 반발을 억압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우파적 외교 전략을 썼다. 물론 처음부터 이른바 ‘트로이카(EU집행위원회, ECB, IMF)’의 양해각서에 그리스 유권자 60% 이상이 반대했지만, 시리자 정부는 여론을 일방적으로 뒤집어 버렸다. 이후 시리자는 조기총선으로 재신임을 얻기는 했지만, 득표율은 2015년 1월 총선에서 얻었던 36.3%에서 35.5%로 줄었고 전체 투표율도 63.6%에서 56.6%로 떨어졌다. 이번에도 투표율은 57%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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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운동 기간 치프라스 총리 포스터가 붙은 길을 한 남성이 지나가고 있다.]



그리스 좌파의 여건


이번 그리스 총선 결과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서 그리스 좌파가 처한 상황을 살펴보자.


우선 이번 선거 결과의 특징 중 하나는 보수정당인 “신민당”이 보수표를 쓸어 모으면서 다른 우파 세력이 몰락한 점이다. 신민당은 2015년에 비해 12%, 5월 유럽의회 선거보다 약 6%를 더 얻어 39.6%를 득표한 반면,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 “그리스 해법”(3.78%)을 제외하면 신자유주의 정당 “토포타미To Potami”, 시리자와 연정을 꾸렸던 독립그리스당ANEL, 우파 중도파연합UC, 황금새벽당 모두 의회 진입에 실패했다. 2015년 선거에서 이들은 각각 10, 9, 18석을 얻었지만, 이번에 의석을 모두 잃으면서 40석에 가까운 의석이 신민당에 돌아갔다. ANEL의 경우에는 이번 선거에 출마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 결과는 극우에 대한 심판이라기보다는, 신민당 자체가 강경한 이민대응책을 비롯해 국수주의적‧인종주의적 정책을 내보이며 극우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 데 그 원인이 있다.


둘째, 시리자는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이탈층은 소폭에 그쳤다. 시리자는 지난 선거에 비해 4%를 잃어 31.53% 득표에 그쳤지만, 경제위기 이전 집권세력이던 “범그리스 사회주의운동PASOK”의 득표율이 2015년 4.7%까지 줄어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낙폭이 크지 않다. 게다가 시리자 정부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야니스 바루파키스(긴축에 반대하다가 결국 장관직에서 사퇴한 바 있음)가 주도해 지난 3월 창당한 “현실적 유럽불복종 전선MeRA25”이 3.44%를 얻어 원내에 진출한 점을 고려하면, 범좌파가 받은 득표 총량은 이전과 유사한 수준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치프라스 총리의 항복에 실망했지만, 경제위기에 책임이 있고 애초 가혹한 긴축을 휘둘렀던 우파보다는 긴축을 완화하겠다는 그의 약속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셋째, 시리자보다 왼편에 있는 좌파 세력의 부진한 성적도 눈에 띈다. 2015년 시리자 정부가 긴축 양해각서를 받아들인 후 시리자에서 25명의 의원이 이탈해 만든 “인민연합Laiki Enotita”은 2015년 9월 선거에서 2.87%를 얻었으나 이번에는 0.28%로 줄어들었으며, 이 당에서 2016년 다시 이탈한 “자유의 과정Plefsi Eleftherias”도 1.46%에 그쳤다. 급진좌파세력의 연합인 “안타르시아ANTARSYA(그리스 반자본주의 좌파 전선)”도 절반이 줄어든 0.41%에 머물렀다. 그리스공산당만이 예전과 비슷한 득표율을 보였다. 시리자가 실패했어도 여전히 많은 유권자가 좌파적 대안을 원하는 반면, 그들의 지지가 급진좌파로 수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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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4일 그리스 의회 앞 광장에서 시리자 지지자들이 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좌파 위기의 원인: 사회주의 전략의 부재


앞서 언급했듯 이번 선거에서 좌파 가운데 바루파키스가 이끄는 MeRA25가 선전하며 유의미한 기록을 냈다. 이들은 친유럽주의를 표방하더라도, 긴축에 대한 시리자의 굴복을 비판하면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상층 운동 중심이며, 그리스나 유럽연합 우파 세력과의 대결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이 조직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리자는 사회주의 세력을 자임했으면서도 유럽연합에 굴복하며 옛 집권세력인 PASOK의 사회민주주의 모습을 답습, 이제 신민당과 더불어 과거와 유사한 양당체제를 다시 시작하고 있다. 바루파키스의 MeRA25 역시 사회주의적 전략은 여전히 모호하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그리스 좌파의 실패는 유럽 좌파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5월 말 유럽의회 선거에서 유럽 좌파는 2014년에 비해 11석을 잃었다. 이들은 경제 정의, 환경, 페미니즘 등을 주장하며 유럽연합의 민주주의를 확대하겠다고 공약했지만, 반()유럽연합 정서를 지휘하며 여론몰이한 극우를 능가하는 쟁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즉,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민중에 전가하는 자본주의의 회복 과정에서 좌파는 사회주의 대안을 적극 제기하며 만들어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결국 경제위기 10년이 경과한 지금에도 유럽을 지배하는 위기는 극우나 자유주의 세력에 자양분이 되고 있고, 그리스에서처럼 우경화가 가속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결국, 사회주의 전략과 계급운동의 기반이 없다면, 경제 위기 아래 좌파 자신도 우경화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번 그리스 총선의 교훈이지 않을까. 이제 다시 집권한 그리스 신민당은 2010년부터 가혹한 긴축을 진두지휘한 장본인이었고, 앞으로도 긴축과 감세, 민영화를 밀어붙이겠다는 계획이다. 다시 시작될 계급투쟁에 좌파의 미래가 달려 있다.



* 2018년 독일 로자룩셈부르크재단이 발행한 <조용한 혁명과 몰락 사이에서>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위기 시 그리스에선 단체협상 분권화가 심화해 2016년 기준으로 산별 등 개별 기업 수준을 넘은 협상은 6.6%에 그쳤다. 또한 2013년부터 그리스 정부는 단체협상 통계나 파업 등 노동 부문 통계를 발행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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