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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것이 좋아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전노협에서 교육사업을 하던 담당자가 그대로 민주노총으로 가면서 우리도 자연스럽게 민주노총에서 필요한 작업들을 했다. 담당자 그녀와 이제 막 건설된 민주노총에서 한 첫 번째 작업은 전형적인 교육물 작업이었다. 제작방식이나 배급방식은 전노협 때와 같았다. 민주노총에서 주제와 테마가 나오면 우리가 대본을 쓰고, 민주노총이 수정해가면서 작품을 완성해내고, 완성한 작품을 우리가 직접 배급했다. 다른 점은, 작품의 길이, 러닝타임이었다. <노동자의 법 노동자의 삶>의 작품 길이는 36분이다.

 

간결함에서 우러나오는 선동의 힘

지금의 교육물이 평균 12분 정도 되니, 36분짜리 교육물은 너무 길었다. 하지만 당시 이 작업 바로 직전에 전노협 시절에 만든 교육물이 70분이었으니 작품 길이가 반절로 줄어든 것이다. 획기적이었다. 교육물 작업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될 뻔했다. 전환점이 되지 못한 이유는 이 작품 이후에 교육물의 길이를 점점 줄여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길어졌다. 교육물이 다시 짧아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최근 몇 년 전부터였다. 작품의 길이가 반으로 줄어들고도 반응은 이전의 교육물보다 훨씬 좋았는데, 우리는 이를 우리의 열정과 능력 탓으로 생각했다. 작품의 길이가 주는 의미를 잘 몰랐다. 아마도 이렇게 된 데에는 이 작품의 길이를 결정한 힘이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고 민주노총의 담당자 그녀에게서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담당자 그녀는 전노협 훨씬 이전부터, 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부터, 노동운동을 했다. 학생운동에서 노동현장으로, 감옥으로, 그리고 노동단체에서 전노협으로 민주노총으로 오면서 노동자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왔다. 민주노총에서 교육 담당을 했을 때 즈음에는 노동자대중교육에서 그녀만큼 경험이 풍부한 활동가는 없었다. 자그마한 키에 티끌하나 없이 하얀 얼굴에, 짧은 머리에, 웃으면 보조개가 예쁘게 들어간다. 나보다 선배임에도 언뜻 보면 중고생처럼 보여서 경비아저씨가 엄마가 누구니?”라고 물을 정도로 어리고 귀엽게 보였다. 물론 그녀와 일을 함께 한다는 건 그녀의 어여쁜 첫인상과 똑떨어지지는 않았다. 칼칼한 성격에 조금의 군더더기도 못 참아내서 함께 일한 후배들이 한 번쯤은 그녀 때문에 울었다.

노뉴단의 교육물에 있어서 전환점이 될 뻔 했던 것은 바로 그녀의 이 칼칼한 성격과 풍부한 노동자대중교육 경험에서 비롯됐다. 그녀는 한 시간이 넘어가는 교육영상은 대중에게 고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영상이 짧아지려면 먼저 대본부터 줄여야겠다는 생각으로 대본 작업에 깊이 관여했다. 고생은 좀 했지만 그녀의 가이드 덕택에 주제를 명확히 하고, 그 주제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생략하는 심플한 대본을 얻게 됐다.

 

투쟁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다

<노동자의 법 노동자의 삶>은 투쟁과제를 소속 조합원들과 공유하고 투쟁에 나서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이 목적에 필요한 것은 왜 투쟁해야 하는지이다. 당시 김영삼정부는 정권 말기에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에 관한 노동개악을 밀어붙이고 있었고, 노동진영은 이것을 저지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투쟁해야 하는 이유를 중심으로 대본을 짧게 했다고 했는데도 작품은 1시간 가까이 나왔다. 담당자 그녀의 적극적인 개입에도 실제 제작을 하는 우리가, 그간 작업해오던 교육물의 방식에서 못 벗어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녀는 완성된 작업에 칼을 들이대서 아낌없이 잘라냈다. 무려 20여분을 넘게 잘라냈다. 잘라내고 보니 내용 전달에 전혀 문제가 없으면서도 군더더기를 쫙 빼, 결국 주제가 훨씬 잘 드러났다. 다른 것으로 고치거나 한 장면도 보강하지 않고 단지 빼기만 했는데도 작품은 몰라보게 단단해졌다. 마치 헐렁하게 묶여 있는 것이 제대로 꽉 묶여져 들고 나갈 채비가 끝난 것 같았다. 그녀의 칼칼함이 없었으면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모든 작업이 짧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 좋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우리들의 대부분의 작업이 느끼는 것을 성취점으로 삼는 작업이라기보다는, ‘지금 당장을 선동해야 하는 작업적 특성 때문에 짧아질수록 대부분 좋아진다. 교육물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작업이 항상 그 시기의 선전과 선동의 과제를 골자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물 본연의 성격이 강할수록 작품이 길어지고 시기적 선전선동의 과제가 강할수록 작품은 짧아진다. 가장 짧게는 7, 길게는 22, 평균 12,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교육물의 작품 길이다.

노동악법에 머리박고 싸워야 한다고 상당히 분명하고 군더더기 없이 주장을 한 이 작품을 배포한 지, 한 달 뒤에 국회에서 노동법 날치기가 있었고 작품에서 그렇게 선동했던 전국노동자총파업이 현실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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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의 법 노동자의 삶> 199611/36/제작: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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