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변혁정치

> 변혁정치
50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7.08.15 07:47

왕바다리

 

휴가 삼아 온가족이 처가에 갔다. 휴가를 왔으니 가까운 뒷산에라도 가야 하지 않겠냐고 아이들을 부추겨 보지만, 한낮 땡볕이 무서운지 집을 나설 낌새가 없다. 오히려 문을 꽁꽁 닫더니 에어컨을 틀고 TV 앞에 드러누워 버렸다. 아이들에게는 그게 더 피서가 될 것도 같아 내버려 두고 혼자 밖으로 나왔다. 덥다, 조금 움직였는데도 땀이 줄줄 흐른다.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바람이 잘 부는 그늘을 찾았다. 마당 어귀 바람길을 찾아 자리 잡고 앉으니, 먼저 와 있는 게 있었다. 바람이 지나는 벽 처마 아래에 왕바다리 열대여섯 마리가 모여 있다.

왕바다리는 말벌 무리에 드는 쌍살벌 종류이다. 쌍살벌을 바다리라고 한다. 왕바다리는 한국산 쌍살벌 가운데 몸집이 가장 크고, 집도 가장 크게 짓는다. 그래서 크다는 의미의 ()이 붙었다. 한낮으로 가면서 더 뜨거워질수록 왕바다리가 계속 날아왔다. 장모님이 그걸 보고는 벌이 피서를 왔나 보네.” 하신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그곳만큼 시원한 곳은 없어 보인다. 정말 더위를 피해 온 것 같다.

왕바다리는 가끔 방송을 탄다. 한여름에는 주택가에 말벌이 출몰했다.”, “119구조대가 출동해서 말벌을 퇴치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온다. 퇴치되는 벌집은 공처럼 둥근 말벌 집뿐 아니라, 사발을 엎어 놓은 것 같은 왕바다리 집도 종종 보인다. 왕바다리는 비바람을 피할 수 있고 햇볕을 가려 주는 주택 처마에 집을 잘 짓는다. 특히 현관문 위에 집을 짓기도 해서, 집을 드나들 때마다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하지만 성질이 사나운 말벌과 달리, 왕바다리 같은 쌍살벌 종류는 공격성이 약해서 벌집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현관문을 드나들다 벌에 쏘일 일은 없다. 지난해 비닐로 지은 텃밭 쉼터 안에 뱀허물쌍상벌이 집을 지었다. 벌집 위에 벌집을 건드리지 않으면 쏘지 않습니다.”라고 써 붙여 놓았다. 문을 드나들다 벌하고 여러 번 부딪치고는 했지만 벌에 쏘인 사람은 없었다. 뱀허물쌍살벌은 부지런히 밭에서 배추벌레 따위를 잡아 주었다.

해가 기울자, 왕바다리들은 다 날아갔다. 다음 날 기온이 다시 오르자, 왕바다리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한 마리, 두 마리 날아오더니 어제와 같은 자리에 같은 수쯤 되는 왕바다리가 모여들었다. 마당 수돗가 고무대야 고인 물에는 별쌍살벌이 부지런히 날아온다. 별쌍상벌은 크기가 왕바다리 절반도 안 되는 작은 쌍살벌이다. 작은 배가 움찔, 움찔거리며 물로 채워져 길어지면 어디론가 날아갔다. 둘째 아이와 수돗가 고무대야 앞에 쪼그리고 앉아 보고 있으려니, 별쌍살벌은 2~3분마다 계속 날아와 물을 머금고 갔다. 벌이 날아간 곳으로 가서 벌집을 찾아봤는데, 꽤나 먼 곳에서 날아왔는지 찾지 못했다. 쌍살벌은 애벌레와 번데기를 무더위로부터 지키기 위해 부지런히 물을 머금어 날라야 한다. 애벌레에게 먹이기도 하지만 집에 뿌려서 열을 식혀야 한다. 물만 뿌리는 게 아니라 날개를 떨어서 바람을 일으켜, 애벌레와 번데기가 들어 있는 방 안도 식혀야 한다.

왕바다리가 모여 있는 벽을 가만히 올려다보니까 처음부터 같은 왕바다리가 쭉 머무는 게 아니라, 가끔 날아가는 왕바다리가 있고 날아오는 왕바다리도 보인다. 서로 돌아가면서 쉬는 걸까? 쉬는 왕바다리와 일하는 왕바다리가 따로 있다면 뜨거운 땡볕에서 계속 일만 해야 하는 왕바다리는 하루도 가지 못해서 더위에 지쳐 죽고 말 것이다. 결국 며칠 만에 왕바다리는 차례로 모두 죽을 것이고, 버려진 애벌레와 번데기도 금세 더위에 쪄 죽을 것이다. 왕바다리는 서로 돌아가며 더위를 식혀서 무더위를 이겨내는 것이었다.

땡볕에서 일하다 쓰러져서 목숨을 잃은 노동자 소식이 들려온다. 올여름 휴가를 가지 못하는 노동자가 절반을 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는 대부분 휴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바람길 벽에 붙은 왕바다리를 보면서 우리 삶이 벌레보다 나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50-벌레이야기.jpg   

그림 강우근

© k2s0o1d6e0s8i2g7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