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보다 ‘왜’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그때, 우리는 제법 큰 오피스텔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10여 명에 육박하는 작업자들이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아마, 곧 30년이 되어가는 노뉴단의 가장 풍요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어느 봄날, 매일매일이 너무나 억울해 죽을 것 같은 마음을 품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어 달라고 청구성심병원 노동자들이 찾아왔다. 주머니 사정은 50만 원인데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당시 청구성심병원은 부당노동행위 사업장의 본보기였다. IMF 이후 한국 노동자의 고단한 현실과 그에 맞서는 노동자의 1년여의 투쟁과 자본의 노동조합 파괴 등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노동자의 싸움은 저마다 고유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때그때 달라요~.’ 조직으로 제작을 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우리의 제작비는 매번 이런 식이다. 원칙도 없고 기준도 없다. 당시 유일한 기준은 제작비를 주는 쪽의 형편과 마음에 달려있었다. 모든 것이 그 쪽의 사정에 달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끔은 지불능력이 있어 보이면 눈치 빠르게 우리 쪽에서 제안을 했고 그것이 통할 때도 있었다. 당시 우리는 제작을 의뢰했을 때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외상으로 한다고 해도 했고, 의뢰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우리의 빚이 늘어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했다. 대단한 책임감과 애정이라기보다는 당시 물리적 조건이 됐기 때문이다. 대개 제작물량보다 제작인원이 더 많았다. 그리고 ‘노동’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거절에 장애가 생기는 ‘좋은 활동가 콤플렉스’도 있었다.
연출자의 깊은 애정과 강한 의욕으로, <꼭 한걸음씩>은 기분 좋게, 그리고 가볍게 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작업이 진행될수록 작업은 쉽지 않았다. 대본은 나오지 않고, 사측의 방해 로 촬영도 여의치 않았다.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연출자는 점점 늪에 빠진 듯이 힘겨워했다. 급기야 장에 탈이 나서 며칠을 설사에 시달리더니 사무실 한쪽 편에 있는 긴 침대의자에 몸져눕고 말았다. 얼굴도 크고 등치도 큰 친구가 홀쭉해져 버렸다.
사실 우리는 한 사업장의 노동과 자본이 싸우는 깊고 내밀한 그 많은 이야기를 맥락을 따라가면서 쉽게 볼 수 있게 만드는 작업을 <꼭 한걸음씩>을 통해 처음 해보았다. 그간 우리가 익숙하게 한 작업으로, 투쟁을 보도하거나 보고하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왜’보다 ‘어떻게’가 더 중요했다. 중앙에서 하는 투쟁과 조직과제를 교육․홍보하는 그간 우리들의 주요 작업은 노동과 자본 간의 구체성보다는 일반성에 더 초점이 있었다. 그러나 한 사업장의 투쟁은 그 사업장만의 이야기와 감정을 요구했다. 청구성심병원의 자본가와 노동자만의 독특한 이야기가 있었고, 그 공간 안에서의 긴장관계를 벗어나는 순간 복잡한 이야기는 더 복잡해지고 감정의 성취는 한발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긴장관계를 유지시키는 동력은 ‘어떻게’ 보다는 ‘왜’에 대한 동의 속에서, 그리고 동의된 ‘왜’의 가치가 클 때 동의는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단순한 투쟁보고서를 넘어선 청구성심병원 투쟁 영상
청구성심병원 노동자 투쟁에는 ‘어떻게’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왜’에 대한 이야기를 작업자에게 요구했고, 작업자가 그것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통증을 수반한 것이다. 여하간 우리는 무의식이긴 했지만 이 작품을 만든 계기이자, 투쟁의 시작을 알린 것이자, 유일하게 중요한 촬영자료이자, 이 작업의 ‘어떻게’를 보여준 정점에 있었던, 1년 전 사측의 ‘노동자 폭력테러 사건’을, 과감하게 프롤로그로 빼버렸다. 본문에서 아껴서 써먹어야 할 주요한 오브제를 프롤로그에 써버린 것이다. <꼭 한걸음씩>이 ‘어떻게’를 보여주기 보다는 ‘왜’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한 것이고, 단순한 투쟁보고서 차원을 넘어서 딴딴해진 교육물이 되었다.
<꼭 한걸음씩>은 이후 한 사업장의 투쟁이 단순히 어떻게 진행됐는지가 아니라 ‘왜’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해서 그에 대한 답을 공감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방식으로 다루는 작업의 모델이 됐다. 50만 원이라는 이제까지 장편 제작물 중 최저가 작업이었지만, 작업의 결과물만큼은 최저가가 아니었다.
*<꼭 한걸음씩–청구성심병원 탄압과 투쟁 보고서> : 1999년 7월 / 47분 / 보건의료노조청구성심병원지부-노동자뉴스제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