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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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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지는 이야기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나하고 같이 사는 남자가 예전에 노뉴단 활동을 했을 때 일이다. 이 남자는 촬영을 너무 못했다. 촬영할 때 화면의 수평을 맞추는 것도 안 됐다. 누군가가 화면의 수평을 맞춰주고 그냥 옆에서 지키기만 하라고 했는데도, 나중에 보면 수평이 안 맞아있다. 본인은 손도 안 댔다는데 수평이 안 맞는다. 이렇게 촬영에 젬병이다 보니, 이 남자는 작업실 안에서만 하는 일에 강했다. 말로 하는 일, 이를테면 남들에게 시키는 일이나, 남들이 촬영해 온 것에서 좋은 화면을 끄집어내거나 두 개의 촬영장면을 붙여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편집이나, 창작 작업자들이 잘 못하는 편집 장비를 고치는 일들에 능하다. 촬영은 말도 안 되게 하면서 편집은 독특하고 디테일했다. 아마도 자신의 단점을 다른 것으로 보완해오다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의 약한 고리를 다른 것으로 보강하면서 강해지는 이야기의 경험을 우리는 <우리들의 역사 노동자의 역사>*에서 했다.

 

함께 이어 붙여 완성한 조각보 같은 작품

이 작업은 1999, 노뉴단이 가장 왕성하게 작업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작업 제안은 노뉴단에게는 다소 낯선 곳으로부터 왔다. 당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사업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부산에서 그간의 민주화 운동을 기리는 민주공원을 만드는데, 그곳에 각종 문화예술물들이 기획됐다. 그곳의 기념관에 설치하기 위해서 민주화 역사 영상이 필요했다.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사였다. 여러모로 매력적인 작업이었다. 우리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간 우리의 주요 관객이었던 노동자에서 익명의 대중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확대하는 것이었고, 제작비도 그때까지 10여 년간 우리가 해 온 단일 작품 중에서 가장 비쌌다.

그러나 망설임이 길었다. 제작을 결정하는 데 많은 문제가 있었다. 1999, 이 해에 우리는 서너 편의 장편 작업들과 몇 편의 단편 작업들을 했다. 이미 우리가 할 수 있는 양을 모두 채운 것이었다. 더욱이 장편들이 이제 막 끝난 상태여서 연출자들은 이미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였다. 누구도 우리 내부에서 이 작업을 혼자 마무리 지을 수 없는 여건이었다. 망설임 끝에 이 문제를 우리는 품앗이 방식으로 해결했다. 4~5명의 연출자가 한 작품에 품앗이를 하듯 나눠서 작업을 하는 것이다. 1~2분의 프롤로그는 상대적으로 감각이 좋은 연출자를, 첫 단락은 중견 연출자를, 둘째 단락은 처음으로 연출하는 후배를, 셋째 단락은 비슷한 역량의 연출자를, 마지막 단락과 에필로그는 노련한 연출자를, 이런 식으로 작업자들의 역량에 따라 조금씩 분담해서 한 작품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이 작업을 보다 미니멀하게 했다. (당시 역사물에서는 꼭 있었던)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인터뷰 방식을 애초부터 포기했고, 한 작업자의 품앗이 분량을 가능한 적게 하기 위해 시기별로 나눈 단락을 줄일 수 있는 한 최대한 줄였다. 또한 여러 작업자들이 개인의 독특한 방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되,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게 관리하고, 대본과 편집의 전 과정을 보다 깊이 개입해서 직접적으로 핸들링하도록 기획자의 역할을 키웠다.

 

서로의 빈 곳을 채우는 품앗이의 소중함

결과는 썩 괜찮았다. 마치 노련한 한 사람이 작업한 것처럼 프롤로그부터 5~6개의 단락이 통일성을 갖고, 역량이 부족한 작업자의 모습이 두드러지지 않고 완성도가 있었다. 오히려 혼자 했을 때보다 더 유기적이고 통일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부터 1990년대까지의 긴 역사를 상당히 심플하게 정리를 한 작품이 됐다. 작업을 의뢰한 쪽에서 대단히 만족해 했고, 노동자 대중교육용 역사 영상으로도 현장에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많이 썼다. 이후 우리뿐 아니라 다른 작업자들의 작품들 속에서도 숱하게 이 작품이 인용됐다. 한때 노동영상계의 스테디셀러였다. 이 작업을 한지 20년이 됐는데도, 아직 이것을 대체할 작업이 나오지 않고 있다.

시간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악조건 속에서 선택했던 작업체계나 진행방식이 뜻밖의 좋은 성과로 나타나는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바로 그때 그 순간에 우리가 갖고 있는 부족하고, 많은 한계들을 서로 나누면서, 품앗이로 극복했던 것이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우리에게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 <우리들의 역사 노동자의 역사> : 1999/ 35/ 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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