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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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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온화함이란 노동자에 대한 기만일 뿐이다

 

하계진부산

 


부산·양산·김해지역은 울산과 창원의 대공장에 납품하는 중소사업장들이 주로 모여있는 곳이다. 내가 일하는 사업장인 성진테크는 김해의 농공단지에 위치해 있으며, 볼보건설기계에 주로 납품하는 중소기업이다. 중장비 탑차를 생산하는 대기업 1차 하청 공장이다. 매출은 연 600억 정도. 관리사원 40여 명을 제외한 현장노동자는 100여 명이다. 하지만 회사가 인정하는 사원 수는 65명 정도. 대략 100명 가까운 현장노동자가 사내하청, 도급, 용역으로 일하고 있다.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길들여진 노동자들

부산·양산·김해지역의 제조업 사업장은 영세한 곳이 유난히 많다. 평균 30여 명 규모의 천여 개 사업장이 모여 있던 부산의 사상공단이 양산·김해로 이전하면서 이 지역은 전국적으로 저임금인 지역으로 손꼽힌다. 그나마 내가 속한 사업장은 1차 하청사업장인데, 2000년 노동조합이 생겨나 다른 사업장에 비해 임금이 다소 나은 편이다. 매출액의 꾸준한 증가와 안정적인 생산도 그 이유일 것이다.

노사관계는, 영세한 사업장들로 구성된 부산지역 일반노동조합(이하 일반노조’)의 다른 사업장에 비해 합리적인 편이다. 하지만 일반노조가 사내하청, 파견의 불법성을 지적하며 이의 시정을 요구했을 때, 사측은 어용노조를 만들어 일반노조의 교섭권을 박탈했고 그야말로 사측이 원하는 모든 것을 관철해나가기 시작했다. 어용노조 조합원들은 일반노조가 만들어온 그간의 성과를 근거로 조합원의 생계 안정성을 보장받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와 임금, 때로는 조합간부들의 영달에만 관심을 갖는다.

길들여진 노동자만을 원하는 사측 입장에서 어용노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동반자다. 하루 10시간 노동은 기본이고, 많을 땐 12~14시간, 주당 70~80시간을 채우며, 사람이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되어도 오로지 임금에만 목을 매는 노동조합과 조합원들. 노동자들의 이 자발적인 복종을 보며 과연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만들 수 있을까 회의가 든다.

현장에는 인간관계가 딱히 없다. 장시간 노동과 농공단지의 특성 때문인지 퇴근 후에는 각자의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동료들과 어울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장시간 노동, 장거리 출퇴근에 짧은 휴게시간. 잠시의 자투리 시간도 현장의 노동자에겐 다시 일하기 위해 잠시 숨 돌릴 시간일 따름이다. 지친 노동의 연속에, 하청·불법파견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까지 더해 일상의 생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정규직 생산노동자의 채용은 없다. 이렇듯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는 비정규 노동의 작업장에 젊은 노동자가 희망을 가져볼 수 있을까? 새로이 현장을 찾아오는 노동자는 다른 곳에서 정년을 넘기고 일자리를 찾던 나이든 노동자가 대부분이다. 간혹 찾아오는 젊은 노동자들은 새벽 6시에 집을 나와 밤 12시에 귀가하는 장시간 노동에 질려 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마른 걸레 쥐어짜듯 고단한 중소영세 비정규직노동자의 삶

모든 사내하청은 불법이다.” 이는 사측도 충분히 아는 내용이다. 2012년 일반노조와 사측이 사내하청에 일하는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에 합의했다. 1차로 2년을 넘긴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추가에 대해서는 2013년에 논의하기로 했다. 진심이었을까?

2013년 사측이 주도한 어용노조가 만들어졌고, 사측의 합의이행 의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2015년 어용노조 집행부와 공동교섭을 통해 정규직 전환에 노력하기로 했지만 어용노조는 양 노조의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후 공동교섭은 아예 외면해버렸다. 당시 공동교섭을 진행했던 어용 집행간부는 모두 직급이 상향되었다.

회사의 이미지는 부드럽다. 게다가 사장도 합리적으로 보인다. 최소한의 노동법은 무리 없이 지키려 애쓴다.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만큼은 예외다. 비정규직노동자에게 최소한의 배려라도 하려던 회사가 정규직 전환 합의 이후에는 철저히 불법파견을 은폐하려 한다. 작업공간을 나누고, 작업복을 구분하고, 작업지시도 하청의 관리자를 통해 전달하려 안간힘을 쏟는다. 법을 지키려는 회사의 노력이 비정규직노동자에 한해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자본은 자신이 통제 가능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곤,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회사를 운영해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언제나 노동자가 자본가의 소모품으로 묵묵히 일만 하기를 바랄 뿐이다.

부드러운 이미지의, 합리적인 중소기업 자본가의 진심은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너희는 일만 할 뿐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근로기준법? 그걸 지키면 나만 손해야.”

세상에 온화한 사람은 많다. 그러나 자본의 온화함이란 노동자에 대한 기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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