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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07.02 15:57

어두운 새벽, 비가 내리고 있다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아직 밖이 어둑어둑한 새벽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이른 새벽에 눈을 뜨고는 더 잠을 못 자고 뒤척인다. 어제 지방 촬영을 외부 촬영자에게 부탁해놓은 일이 영 맘에 걸린다. 촬영은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활동가나 금속노조 지부 간부들의 인터뷰였을 것이다. 우리는 경남 녹산공단, 서울 구로디지털단지, 안산 반월공단, 경주 외동공단 등 영세한 공단지역에서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활동가들의 이야기와 이들의 노력으로 노조를 건설한 신규노조 이야기를 담는 <새로운 희망이 시작되고 있다>를 작업하고 있었다.


노련한 친구인데 어련히 촬영을 잘할까. 새벽잠을 못 이룬 것은, 촬영갈 그 친구의 주머니 사정이 최근에 영 좋지 못해서 촬영을 부탁할 때 미리 차비를 줘야 하는 사정 때문이다. 나는 어제 돈이 없어 왕복 차비 10만 원을 사무실에서 못 보내고 집에 들어온 것이다. 운 좋게 촬영하는 친구의 호주머니에 돈이 있어서 그냥 촬영하러 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이 새벽에 전화가 오지 않을 것인데. 그러나 전화가 온다. 그도 차비를 해결 못 하고, 이 새벽에 죽기보다 싫은 전화를 나에게 한다. 카드로 기차표를 끊어 출력해서 핸드폰으로 찍어서 보낼 생각으로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하고, 출발 1시간을 남겨놓고 허둥대며 카드로 기차표를 끊는다. 도무지 철도 회원 번호가 핸드폰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지가 생각이 안 난다. 간신히 회원 번호를 찾았는데 이번에는 기억하는 비밀번호를 아무리 쳐봐도 안 된다. 결국 새 비밀번호를 등록해서 예매를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사용 한도를 초과했다고 뜬다.


자는 남편을 깨울까 하다가 걸핏하면 다 죽은 목소리로 돈 좀 보내 달라고 해놓고 안 갚은 것이 한 무더기라, 깨우지를 못하고 지갑과 우산을 챙겨 들고 은행에 가기 위해서 집을 나선다. 통장에 돈이 있어서가 아니라 몇 개의 통장 잔액이 만 원 넘게 찍혀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서다. 그것을 한데 모아 편도 차비 5만 원이라도 보낼 셈이었다. 은행 365일 코너의 문을 연다. 안 열린다. 안내문을 보니 아침 7시부터란다. 7시가 되려면 아직 40분도 더 있어야 한다. 다시 비가 내리는 어두운 새벽길을 따라 집으로 온다.


우선 냉장고를 열어 보리차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남편을 깨우러 안방을 향해 간다.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 10만 원은 오히려 짜증 내지 않을까? 20만 원을 꿔달라고 할까? 아는 사람이 갑자기 아프다고 할까? 방문을 막 열려고 하는데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차비 구했어요. 걱정 마세요. 쌩하니 갔다 올게요.” 미안하다는 말도, 차비를 어떻게 구했는지도, 물어볼 새도 없이 지금 나가야 차를 탄다며 급하게 전화를 끊는다.


새벽에 내린 비는 이제 그쳤다. 사무실을 가기 위해 탄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바라본 풍경은 비 갠 후에 얼마나 상쾌하고 맑은 하늘인지. 그러나 새벽에 내린 비가 내 가슴에는 아직 내리고 있다. 깔막이 진 오래된 단독주택의 마당에서 가파른 2층 계단을 올라가 우리 사무실 문을 연다. 이제는 쓰지 않는 오래된 수백 개의 16밀리 비디오테이프에서 나는 곰팡이 냄새, 20년 넘게 끌고 다닌 각종 자료와 책에서 나는 눅눅한 종이 냄새. 환기가 잘 안 된 사무실 여기저기에 배어 있다가 아침 바람에 섞여 확 풍겨 나온다. 숨이 탁 막힌다. 노뉴단의 향기다. 우리 사무실이 머금고 있는 익숙한 냄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슬픔이 밀려온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다. 사무실 문을 잡고 서서 한참을 울었다. 24년을 넘게 똑같은 일을 해왔는데도, 비가 내리는 어두운 새벽에 촬영을 나서는 동료에게 5만 원을 못 보내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오늘 같은 그런 새벽이,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다.


노뉴단이라는 긴 항해를 여기서 멈춰야 하나.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은 빚은 어떻게 할까. 좀 더 현명했더라면 조금은 지금과 달라져 있을까. 내 어두운 가슴속에 내리는 비는 언제나 멈춰질까. 그날 아침, 그렇게 울었다.


* <새로운 희망이 시작되고 있다> 24분/2012년 6월/제작 금속노조, 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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