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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앞의 사회주의


이종회┃사회주의 대중화 사업 특별위원장



금기가 된 이름, ‘사회주의’


20세기 전반기 두 차례의 큰 공황과 전쟁은 인류를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인구의 20%를 동원했고 그 희생자만 5천만 명에 달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자 1천만 명을 포함해 희생자가 3천만 명에 이르는 최악의 전쟁을 경험하고도, 인류는 그 기억을 채 잊기도 전에 더 엄청난 전쟁에 휘말렸다. 그것은 자본의 전쟁이었으며, 인류 절멸의 전쟁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자본주의의 ‘임박한 파국’에 맞닥뜨린 노동자·민중은 ‘야만이냐 사회주의냐’의 갈림길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라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삶의 문제였고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뒤이은 새로운 화근이었던 나치와 히틀러의 등장을 막지 못한 결정적 원인은 1919년 독일 노동자혁명의 패배였다. 이후 히틀러는 노동자·민중에게 사회주의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눈길을 돌리게 했다.


“나치가 사회주의자를 공격했을 때 조금 불안했지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치가 학교, 신문사, 유대인 등을 잇따라 공격했을 때, 나는 더 불안했지만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마침내 나치는 교회를 공격했다. 나는 목사였고, 그때서야 행동에 나섰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독일 고백교회(히틀러에 반대한 교회) 니묄러 목사의 증언처럼, 2차 세계대전의 본질도 자본의 전쟁이었고 노동자·민중은 또다시 총알받이로 전쟁에 내몰렸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했고,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졌다. 한반도는 체제 간의 대리전쟁, 이념전쟁의 장이 됐다. 사상자가 5백만 명에 이르렀고, 민간인 피해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쟁을 거치며 남쪽에서는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분단체제가 형성, 유지됐다. 20세기 초, 생존과 삶의 문제였던 사회주의가 한반도 남쪽에서는 ‘그 이름조차 말할 수 없는’ 이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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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2008년, 100년 만의 공황이 덮쳐왔다. 미국에서 시작한 공황은 ‘손실을 사회화’하며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민중에게 그리고 주변국에 전가했다. 그리하여 아랍, 남유럽, 아시아 그리고 미국에서 노동자·민중의 생존을 위한 강력한 투쟁이 벌어졌다. 그 투쟁을 거치면서 지금 세계의 정치는 중도세력이 후퇴하고 좌와 우의 정치세력이 약진하는 지형으로 변했다. 미국의 2016년 대통령 선거가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줬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외치는 트럼프가 무역 담벼락을 높이 세우면서 경제 전쟁이 시작됐고, 이로 인해 ‘자유무역’이 마치 평화를 상징하는 용어가 되고 있다. 하지만 ‘자유’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자본은 마음껏 국경을 넘나드는 반면 노동자는 국경에 가로막히고 이민 장벽은 더 높아지고 있다. 최근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세력이 약진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 이는 미국을 넘어 세계적 현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극우만 약진한 게 아니다. 자본주의 주축국 미국에서 ‘사회주의’를 내건 샌더스의 돌풍이 있었다. 2008년 경제위기로 거리에 내몰린 빈민들, 월스트리트를 점거했던 아큐파이 운동의 힘, 최저임금 15달러 투쟁 등 10여년에 걸친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바로 사회주의를 내건 샌더스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 투쟁의 선봉에 섰던 이들은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주의회를 비롯해 국회와 시장선거에서 당선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극우의 약진과 사회주의의 부상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선택을 강요당하던 100년 전의 상황과 닮아가고 있다.


최근 내셔널헤럴드 지National Herald는 “샌더스에게 사회주의는 외국인 혐오와 권위주의로 경제를 혼합한 트럼프에 맞서 모든 국민에게 적절한 삶의 경제적 표준을 보장하는 사회”이고, 이에 트럼프는 “미국은 결코 사회주의 국가가 될 수 없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주류경제학자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나 좌파 일각에서는 (샌더스의)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며 심지어는 진정한 사회주의의 장애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샌더스가 미국 청년들에게 사회주의를 대중화시키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공공연하게 ‘사회주의’를 말할 때


2016년 촛불항쟁을 거치면서 한국의 정치지형 역시 확연히 변하고 있다. 그간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53년 분단체제에 균열이 가고 있으며, 남북·북미 관계의 재편 가능성이 확대되고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등으로 기존 정치체제도 일정하게 변하려 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제도권 정당인 정의당 당대표 경선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건 주자가 나선 대목도 눈에 띈다. 그 “민주적 사회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일단 유보하더라도 말이다. 삶과 생존, 그리고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큰길로서의 사회주의가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다시금 유력한 정치적 대안이 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직전 던져진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질문은 지금의 세계정치지형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에서도 53년 분단체제가 허물어질 정세가 형성되고 있으며, 87년 체제와 97년 체제 역시 노동자·민중의 삶과 생존을 보장할 수 없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새로운 체제를 열어가야 한다. 자본주의가 몰고 온 야만과 피폐한 삶을 떨쳐낼 새로운 체제,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다. 바로 지금부터 금기와 침묵을 깨고, 사회주의를 대중화하면서 그 길로 나가는 지평을 확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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