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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이란, 

고조되는 중동의 위기


최재훈┃경계를 넘어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미국의 진보석학인 노엄 촘스키 교수는 밀려드는 강연 요청에 심지어 몇 년 뒤 일정까지 미리 잡아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허나 그럴 경우 강연 주제를 무엇으로 할지 문제가 아닐 수 없는데, 한동안 골머리를 앓던 그가 찾아낸 묘수는 바로 “중동의 현재 위기”라는 제목을 내거는 것이었다. 중동의 위기가 정확히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위기가 계속되리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불행히도 그의 혜안이 적중했는지, 최근 중동에 다시 커다란 위기감이 감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중동 전체를 뒤덮었던 전운이 자칫 ‘퍼펙트 스톰’(여러 개의 작은 태풍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 태풍으로 발전하는 현상)으로 진화할 조짐을 보인다.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 전쟁,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등의 개입으로 인해 “최대의 인도주의적 위기”로까지 번진 예멘 전쟁, 잊을만하면 수시로 되풀이되는 이스라엘과 레바논 헤즈볼라 간의 무력 충돌,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사이의 지역 패권 경쟁. 이 모든 갈등이 가장 암울하고 파괴적인 시나리오, 즉 미국과 지역 내 친미 대리 국가들에 의한 대이란 군사 행동으로 귀결될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위기의 원인: 미국의 도발


직접적인 발단은 지난해인 2018년 5월 8일 트럼프 미 대통령이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이른바 이란 핵 합의를 거부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면서부터다. 전임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5년 7월 체결된 이란 핵 합의는 이란이 우라늄을 농축할 수 있는 원심분리기를 3분의 1로 감축하고, 향후 15년 동안 3.67% 이상 농축된 우라늄 생산을 중단하며, 저농축 우라늄 재고를 300kg 이내로 유지하는 등의 비핵화 조치를 취하고 국제기구의 자유로운 사찰을 허용했다. 대신, 미국은 이란에 부과된 제재를 해제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미국과 이란 간의 양자 합의가 아니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다 독일까지 참여한(P5+1) 다자 합의였다. 뿐만 아니라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유엔, 심지어 미 CIA까지도 이란이 합의를 성실히 이행했다고 일관되게 평가했다. 그럼에도 “역사상 최악의 합의”이자 “핵심부터 결함투성이”라는 근거 없는 비난을 늘어놓으며 일방적으로 합의를 폐기한 미국 정부의 행위는 누가 봐도 억지에 불과했다.


그런데 아무리 억지라도 미국이 부리면 곧 국제 질서가 되는 법. 1979년 이란 미 대사관 인질 사건 이후부터 부과되기 시작해 1996년 ‘이란-리비아 제재 법안’으로 확대되며 이란 경제를 질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대이란 경제 제재가 2015년 핵 합의로 겨우 해제돼 이란 국민의 숨통을 틔워주는가 싶더니, 다시 예전보다 더욱 강력한 형태로 부활했다. 이란과 거래하는 외국 정부‧기업까지 제재하는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 때문에 일본, 한국, 인도, 이탈리아, 대만, 그리스 등은 차례로 이란의 원유와 가스 수입을 중단했다. 그 바람에 하루 250만 배럴이던 이란의 원유 생산량은 그 10분의 1에 불과한 25만 배럴로 급전직하했다. 연간 22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 시장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는 트럼프의 엄포에 각국 기업은 비행기부터 금, 카페트, 심지어 피스타치오 땅콩의 수출입까지도 줄줄이 취소해야 했다. 그리고 올해 4월 8일, 트럼프 정부는 이란군 최정예 부대인 혁명 수비대IRGC를 해외 테러 조직으로 지정함으로써 이란에 대한 자신들의 ‘최대의 압박’ 전략의 정점을 찍었다. 주권 국가의 정규군을 테러 조직으로 규정한 사상 첫 사례였다.


이란 입장에서 보면, 트럼프 행정부의 행위는 선전 포고만 없었다 뿐이지 사실상 “이래도 가만히 있을 거야? 자신 있으면 나와서 한판 붙어보지 그래” 하는 수준의 도발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했다. 따라서 이란 정부가 세계 에너지 물동량의 5분의 1이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위협하는 것도, 본보기로 영국 유조선을 나포한 것도 미국의 도발에 대한 방어적 대응 성격이 강했다. 이란 정부가 2015년 합의에서 3.67%로 제한했던 우라늄 농축 비율을 4.5%로 끌어올리고(핵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라늄을 90% 이상 농축해야 한다), 저농축 우라늄 재고 상한선인 300kg을 지키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이 먼저 합의를 깼으니 다른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국제 사회가 미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합의를 되살리라는 메시지일 뿐,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말처럼 “세계 에너지 공급망에 전례 없는 공격”을 가할 의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과 서구 주류 언론은 이란이 핵 합의를 위반하고 지역 안정을 위협한다는 보도를 작년부터 연일 쏟아낸다. 미국 정부가 먼저 핵 합의 무효를 선언했으니, 논리적으로 봐도 이란이 위반하려야 위반할 합의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언론 보도의 영향 때문인지, 2015년 여름만 해도 이란 핵 합의 지지율이 70%에 육박하던 미국 국민 여론도 이제 완전히 바뀌어 부정적 여론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트럼프가 이란 핵 합의를 뒤엎고 대결 국면에 돌입해 노리는 건 바로 그 지점이다. 내년 11월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그는 당선을 위한 핵심 전략으로서 외부의 적을 끌어들여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강한 대통령’의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혈안이 돼 있는데, 거기에 활용하는 세 가지 외부의 적이 중남미 이민자들, 중국, 그리고 이란이다.



이란 민중의 서사


그러나 이란과의 대결 국면 조성이 표 몰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이란에 대한 적대감이 그만큼 미국 국민 사이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렇다면 그 출발점은 어디일까? 바로 1979년 팔레비 왕조를 몰아낸 이슬람 혁명이 있던 해 11월에 일어난 미 대사관 인질 위기가 그것이다. 당시 혁명을 지지하던 강경 이슬람주의 학생들에 의해 52명의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 직원과 가족이 444일 동안 대사관 건물에 인질로 잡혀 있던 그 사건은 ‘이란은 위험하고 믿지 못할 나라’라는 인식을 미국 대중에게 강하게 심어주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미국 중심의 일방적 서사에서 벗어나 이란 민중의 관점에서 양국 관계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란 민중에게 미국에 관한 집단 기억의 출발점은 1979년이 아니라 더 오래 전인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중반부터 영국과 러시아 간 ‘그레이트 게임’의 각축장이었던 이란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947년부터 1951년 사이에 총리만 여섯 번 바뀔 정도로 불안했던 정국을 뚫고 1951년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가 이끄는 민족주의 정부를 출범시켰다. 모사데크 정부가 가장 야심차게 추진한 정책 중 하나는 이란의 석유 자원을 독점하던 <앵글로-이란 석유회사>(오늘날 BP의 전신)를 몰아내고 석유 산업을 국유화한 것이었다. 그러자 이를 빌미로 미국 CIA는 영국 해외정보국MI6과 함께 군사 쿠데타를 배후 조종해 레자 팔레비 국왕을 다시 권력에 앉혔다. 그렇게 미국에 신세를 진 팔레비 왕조는 철저히 친미 친서구의 길을 걸었고, 그로 인해 이란은 1979년 혁명 전까지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미국의 중동 패권을 유지하는 세 기둥 가운데 하나를 담당했다.


이런 역사적 서사를 이해한다면, 미국이 오늘날 이란을 상대로 가하는 ‘최대의 압박’ 전략이 먹힐 가능성은 희박함을 알 수 있다. 미국에 굴복한다는 것은 이란에게 1979년 이전의 친미 대리국가로 돌아가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반면 이 전략은 지역 안정을 위협하는 원인으로만 작용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대이란 강경책이 국내 정치용이라 해도, 긴장이 고조되고 물리적 대치가 길어지면 예기치 않은 무력 충돌 가능성도 높아진다. 트럼프가 군사 공격 개시 10분 전에 자신이 공격 취소를 명령했다던 지난 6월 미군 무인기 격추 사건이나, 9월에 사우디 정유시설 두 곳이 공격당하면서 전쟁 위기가 한껏 고조된 게 대표적이다.


게다가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언제든 미국의 허락만 떨어지면 이란을 덮칠 준비가 돼 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눈앞의 현실이 된다면, 그 결과는 정말 파괴적이고 치명적일 것이다. 미국을 제외하더라도 사우디와 UAE를 위시한 걸프 왕정국가들, 이스라엘, 이란, 레바논의 헤즈볼라, 시리아 정부,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 예멘의 후티 반군이 모두 뒤엉켜 싸우는 그야말로 중동 대전으로 비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한 전망을 면밀히 따져보지 않은 채, 오로지 북-미 협상에서 미국의 전향적 태도 하나만 바라보고 호르무즈 해협으로 청해 부대를 쪼르르 들여보낸 한국 정부가 문제인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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