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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

: 자유주의와 포퓰리즘 사이,

분노와 침묵 속의 노동계급


이주용┃기관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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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Left Voice]



요새 주가가 크게 하락할 때마다 증권가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핑계’(일정하게는 사실이기도 한)가 있다. 바로 ‘미국 대선을 둘러싼 불확실성’이다. 혼란의 핵심 변수로 지목되는 건 공공연히 ‘선거 결과 불복’ 의사를 흘리고 다니는 트럼프다. <변혁정치> 이번 호를 독자들이 받아볼 즈음이면 ‘깔끔한 결말’이든 ‘지저분한 난장’이든 어느 하나로 판가름이 나겠지만, 일단 지금으로선 ‘대선 불복 시 투표일 이후 한 달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을 수 있다’는 예측이 곳곳에서 나오는 상황이다. 물론 한쪽이 압도적 혹은 확실한 표차로 승리한다면 그만큼 불복의 여지도 줄어들겠지만, 일단 여론조사상 지지율 격차가 좁혀지고 있으니 온갖 시나리오가 생겨난다.



우익 포퓰리스트를 지지하는 

노동계급?


트럼프의 자신감(혹은 객기)에는 근거가 있다. 이런저런 언론이나 전문가들이 그의 핵심 지지층으로 꼽는 집단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게 ‘백인 하층 노동계급’이다. 2016년에도 그랬지만, 이번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경합주(공화당과 민주당의 지지율이 엇비슷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곳)’ 상당수를 차지하는 쇠락한 산업지대(‘녹슨 지대’를 뜻하는 ‘러스트 벨트’로 불림)에서 수십 년간 경제적 몰락을 경험하며 불만을 축적한 이 노동자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선거 결과는 뒤바뀔 수 있다. 이 지역은 인구도 적지 않은데, 지난 대선 때 트럼프가 여기에서 선거인단을 쓸어 담으며 힐러리 클린턴을 눌렀다.


물론 ‘미국 노동계급이 트럼프를 지지한다(혹은 했다)’고 섣불리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간 <변혁정치> 지면에서 다뤘듯 올해만 해도 조지 플로이드 살해 사건에 분노한 민중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1, 코로나 확산 이후에도 일해야 했던 ‘필수 노동자’를 비롯해 교사 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됐다.2 게다가 지난 2016년 미국 대선 투표율은 55% 정도에 머물렀는데, 이는 유권자 절반 가까이가 아예 투표에 참여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곧, 많은 노동대중이 제도 정치에 염증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을 그대로 ‘트럼프 지지자’라고 해석하는 것은 비약이다(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한번 거론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 ‘쓰레기 백인’이라는 뜻)라는 혐오 섞인 멸칭으로 불리는 저학력‧저소득 백인 하층 노동자들의 많은 수가 앞서 언급했듯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 지지 경향을 보인 건 사실이다. 이들은 현재 여론조사에서도 바이든보다는 트럼프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트럼프 정부는 진정 지난 4년간 이 노동자들을 대변했을까?



불타오른 주식시장, 

재만 남은 저소득층


트럼프는 근래 ‘사회주의’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한 대통령일 것이다. 그는 틈만 나면 바이든과 민주당에 ‘좌파’라는 딱지를 붙여 ‘저들이 나라를 망치려 한다’는 고질적인 우익 선동적 메시지를 반복한다(물론 이들 민주당 주류는 사회주의와는 대척점에 있다. “미국 대선: ‘도로 민주당’과 샌더스 연합”, <변혁정치> 115호(10월 15일 자) 기사 참조). 단적으로 트럼프는 바이든과 민주당이 재정 지출을 폭발적으로 늘려 ‘거대한 정부’를 만들고 ‘개인과 기업의 자유를 침해할 것’이라고 공격한다(사실 트럼프 역시 이주민 차단을 위한 국경 장벽 보강이나 대기업 지원 등 자신과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서는 얼마든 막대한 공적 자금을 사용했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 정부의 명확한 계급적 성격을 드러낸 게 대대적인 법인세 인하다. 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러 친기업 언론이 트럼프 정부를 칭송하는 가장 큰, 혹은 거의 유일한 요소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지난 대선에서 당선한 직후부터 법인세율을 35%에서 21%로 대폭 낮췄다. 당연히 기업의 부담은 크게 줄고, 이윤은 늘어났다. 불평등과 조세 문제 전문가이자 버니 샌더스의 자문 역할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 경제학자 가브리엘 주크먼에 따르면, 현재 미국 국민소득에서 법인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1% 수준으로 낮아졌다(이 비율은 1950년대 초반 약 7%로 정점에 달한 뒤 그 직후부터 급격하게 감소했는데, 맑스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는 이에 관해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 이전에도 법인세 비중이 크게 줄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트럼프는 물론이고 레이건 이전의 ‘전통적인’ 미국 역대 정부도 근본적으로 기업 이익 수호라는 문법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기업 지원에 힘입어 미국 증시는 큰 폭으로 상승했고, 트럼프는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는 바로미터로 주식시장 활황을 줄곧 인용했다. 2019년 말 기준, 대표적인 미국 주가지수 S&P 500은 2008년 대공황 이전인 2005년 초보다 2.5배 이상으로 뛰어오르며 같은 기간 다른 글로벌 주가지수보다 50% 이상의 급등세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 이익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아니라 주식 부자들에게 돌아갔다. 미국에서 전체 주식의 약 90%는 상위 10% 부유층이 쥐고 있으며(최상층 1%가 주식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하층 노동자들은 자산 투자는커녕 저축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한편, 이런 분석결과를 내놓은 <이코노미스트 The Economist>지는 이렇듯 트럼프 정부의 법인세 축소가 ‘당초 약속했던 기업 투자의 획기적 증대로 이어진 증거는 거의 없다’고 냉정하게 결론지었다. 실제로 미국의 기업 투자 증가율은 2010년대 전반기나 2008년 경제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트럼프 집권 이후 약간 상승했으나 2019년부터 다시 주춤하는 양상이었다. 게다가 트럼프 정부에서 코로나 이전까지 실업률이 상당히 낮은 수치로까지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세계 주요국 자본주의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 흐름이었고, 이조차 2019년에 이르면 이미 미국 내 제조업 일자리는 거의 늘지 않고 있었다3(코로나 확산 이후 미국에서 실업자가 수백만 명 단위로 폭증한 것은 그 직전의 ‘실업률 감소’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팬데믹 이후 미국에서 기업에 대한 지원은 더욱 극적으로 나타났다. 사회학자이자 사회운동 연구자인 제프리 플레이어스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2조 달러(약 2,400조 원) 규모 ‘코로나 부양책’ 가운데 1/4에 해당하는 5천억 달러가 대기업으로 흘러 들어갔다. 반면, 공공서비스 지출은 9%에 불과했고, 저소득층 식료품 지원에는 고작 4.5억 달러(약 0.02%)만 배정했다.4 현재 미국의 ‘영구 실업자(기존 직장에서 완전히 해고된 노동자)’가 4백만 명에 다다르고(미국 노동부 발표), 자녀가 있는 가구의 약 14% 이상(연 25,000달러 미만 저소득 가구에서는 무려 35%)이 식량 부족을 호소하는 한편 세입자 가정의 28%가 당장 다음 달 월세도 내기 어렵다고 답하는 상황에서5, 이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원은 더 이상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듯 가속하는 불평등과 생존의 위기 속에서, 하층 노동계급은 다시 한번 배신당했다.



‘불안한 침묵’, 언제까지?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백인 하층 노동자들이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선뜻 거둬들이는 것 같진 않다. 혹은, ‘바이든 지지로 선회하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확할지도 모르겠다. 노동계급이 분열‧분할된 채 그들의 계급적 이해를 당파적으로 대변하며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 정치세력이 부재할 때, 애국주의나 배타적 민족주의, 정체성이 다른 집단과 기득권에 대한 혐오 등이 온통 뒤섞인 우익 포퓰리즘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 자리는 넓어진다. 트럼프가 ‘콘크리트 지지’를 유지하는 것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이러한 대중적 심리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거꾸로 기득권 지배세력의 꽤 많은 옹호자들이 왜 바이든을 지지하는지 들여다보는 것이다. 가령, 사회주의에 대한 경멸을 트럼프만큼이나 자주 (다만 약간 더 세련된 언어로) 쏟아내는 세계적인 자유주의 대변지 <이코노미스트>는 “바이든 당선이 미국 자본주의를 망칠 거라는 주장은 헛소리”라며 “그는 좌파의 유토피아적 구상을 거부해왔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바이든이 너무 실용주의적이어서 선명성[혹은 과감함]이 떨어지는 게 진짜 위험”이라고 지적하는데, 자유주의자가 볼 때조차 바이든은 ‘지나치게 온건해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자유주의 정론지가 바이든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가 기존 제도 질서의 일원이자 이를 가장 충실하게 수호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6


트럼프를 지지했던 하층 노동자들에겐 바로 그 이유가 바이든으로 쉽게 돌아설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바이든이든 트럼프든 둘 다 저소득층과는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들이지만, 지난 수십 년간 ‘세계화’라는 깃발 아래 민중의 삶을 빈곤과 불안정으로 몰아넣었던 기존 제도 정치질서의 대표자인 바이든보다는, 그 제도권 정치인들을 향해 ‘고상한 토론 규칙’ 따위는 날려버리고 모욕과 비난을 퍼붓는 트럼프에게 모종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물론 앞서 얘기한 지난 4년의 경험에서 드러나듯, 트럼프 정부는 노동계급에 황폐한 결과를 떠안기며 자본가와 부자들에겐 거대한 수익을 가져다줬다. 바이든은 믿지 못하겠고 트럼프에게도 배신당한 노동자들은 분노 섞인 침묵에 빠져들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서 많은 사람이 사전투표에 참여하고 있긴 하지만, 1970년대 이래 미국 대선 투표율이 60%를 넘긴 적은 없었다. 유권자의 40% 이상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선거에서 ‘침묵’했다. 미국 노동운동의 정치적 궤적을 분석한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는 레이건이 당선한 1980년 대선을 앞둔 노동계급의 분위기를 단편적으로나마 이렇게 묘사했다: “비웃음과 휘파람이 난무하는 가운데 한 노동자는 미온적인 태도로 그래도 ‘그중 덜 나쁜 축’이라고 카터[민주당 출신의 당시 현직 대통령.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에게 패배] 편을 들었으며, 또 한 사람은 더더욱 열의없는 어조로 ‘항의’표로 레이건을 찍자는 주장을 넌지시 비추었다. 결국 한 사람이 단호한 목소리로 유세장에서 대다수가 선택한 NOTA(none of the above, 뽑을 놈 하나도 없다)를 외치자 대개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100년 동안 미국의 선거 중 반 이상이 노동계급의 ‘침묵하는 다수’가 불참한 가운데 행해진 것이다.”7


물론 이들이 영원히 ‘침묵’으로 일관하진 않는다. 한편으로는 선거에서 트럼프에게 표를 던지는 것을 넘어, 직접 무장을 갖추고 우익 테러를 계획하는 집단이 늘고 있다. 다른 한편, 최근 몇 년간 ‘사회주의’의 이름 아래 새로운 정치집단이 형성되고 불어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호 <변혁정치>에 실린 기사(“미국 대선: ‘도로 민주당’과 샌더스 연합”)가 지적했듯, ‘민주적 사회주의’ 바람을 일으킨 이들은 ‘민주당 내 개혁’이라는 노선을 고수하면서 노동계급 하층의 불만을 독자적으로 대변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버니 샌더스가 바이든 당선 시 노동부 장관직을 희망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가운데, 좌파 일각에서 이를 꽤나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지지하는 듯하다.8 물론 바이든이 이를 받아들일지는 의문이지만, 이런 움직임이 현실화할 경우 사회주의 세력은 노동대중에게 민주당 정권과 도매금으로 인식될 위험이 더 커진다.


이번 미국 대선은 결국 또다시 ‘최악이냐 차악이냐’의 왜곡된 구도로 치러지지만, 누가 당선하든 고조하는 노동계급 하층의 불만을 수렴하지 못한 채 문제를 더욱 키우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갈림길이 점점 앞으로 다가오는 시점에서, 독자적인 노동계급 정당을 향해 분투하는 미국 사회주의자들의 노력이 소중한 이유다.



1 <변혁정치> 109호(7월 1일 자) 및 112호(9월 1일 자)에 실린 “미국 사회는 왜 다시 불타오르는가”, “자본의 지팡이, 경찰을 해체하라” 기사 참조.


2 <변혁정치> 106호(5월 15일 자) 및 113호(9월 15일 자)에 실린 “코로나 시대의 ‘블루’ 노동 그리고 저항”, “미국 교사노동자들의 ‘안전한 학교’ 위한 싸움” 기사 참조.


<The Economist> 10월 17일 자의 다음 기사 참조: “Trumponomics: Watered with liberal tears”(트럼프 경제정책: 자유주의의 눈물로 물들다), “The saver's dilemma”(저축자의 딜레마), “Grading Trumponomics”(트럼프 경제정책 평가).


Geoffrey Pleyers, “The Pandemic is a battlefield. Social movements in the COVID-19 lockdown”, <Journal of Civil Society>, 2020년 8월 6일. 이 글은 <변혁정치> 115호(10월 15일 자)에서 “팬데믹은 전장이다: 코로나19 봉쇄 속 사회운동”이라는 번역기사로 소개한 바 있다.


5 미국 통계청 조사를 인용해 <The Economist>가 10월 3일 자 기사 “Measuring poverty: And the poor get poorer”(더 가난해진 빈곤층)에서 보도한 내용.


<The Economist> 10월 3일 자의 다음 기사 참조: “Bidenomics”(바이든 경제정책), “Joe Biden's economic plans: The pragmatist”(조 바이든의 경제 계획: 실용주의자).


마이크 데이비스(김영희‧한기욱 옮김),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미국 노동계급사의 정치경제학』, 창작과비평사, 1994.


<Jacobin> 10월 27일 자 기사 “Bernie Sanders Would Make a Very Good Secretary of Labor”(버니 샌더스는 아주 훌륭한 노동부 장관이 될 것)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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