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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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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폐기와

개량주의로 가는 길

독일 사회민주주의자 2: 수정주의 논쟁 1


이재유┃서울



지난 호 연재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엥겔스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그에 따른 정치적 입장은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나타난 대립적 견해, 곧 ‘경제결정론(정치나 법률, 의식과 사상 등은 경제적 토대에 의해 결정되며, 체제 붕괴와 혁명이 다소 기계론적 의미에서 필연이라는 사고방식)’과 ‘수정주의(혁명은 올바른 길이 아니며, 사회주의는 궁극적 목표일 뿐 그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맑스의 사상을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 양쪽 모두에게 유리한 논거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변혁정치> 114호(2020년 10월 1일 자) 기사 “엥겔스, 맑스주의 논쟁사의 시작” 참고).


이를 바탕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걸쳐 독일에서 ‘수정주의 논쟁’이 일어났다. 이때는 제2인터내셔널(1889~1916: 유럽 각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연합체)의 전성기로, 그 가운데 규모에서나 이론적 권위에서나 독일 사회민주당은 사실상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즉,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벌어진 거대한 논쟁은 전체 사회민주주의 진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수정주의 논쟁의 직접적 요인이자 시대적 배경은 1차 세계대공황(1873~1895년)이었다. 이 대공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베른슈타인을 대표로 하는 ‘수정주의’와 △카우츠키를 대표로 하는 ‘경제결정론’이 대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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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진: wikipedia]



시대적 배경: 1차 세계대공황


1차 세계대공황은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공황이었다. 그 원인은 생산의 발전에 따른 과잉 공급과 이에 따른 자본의 이윤 하락이었다. 그런데 이 공황 때문에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경제적 변화를 살펴보면, 계급 간 모순이 심화하는 한편 자본가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트러스트‧카르텔 등 산업 독점화 현상이 대두했다. 또한, 은행의 집중화 현상으로 금융자본이 형성됐고, 대규모 자본 수출로 국가 간 경쟁과 불균등한 발전이 심화하면서 군비 경쟁이 가속하는 동시에 전쟁 위험도 커졌다.


경제적 변화에 따른 사회적 변화로는 일단 계급 간 모순 심화 때문에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더불어, 기존의 직업별 노동조합 형태에서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나아갔다). 이와 함께 금융자본과 자본 수출 활성화에 따라 해외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식민지 국가의 민족 해방’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게다가 전쟁 위험이 가시화함에 따라 전쟁을 막기 위한 국내‧국제적 노력이 강화됐고, 노동계급의 국제적 연대감도 고조했다.


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정치적 변화가 나타났다: 독일제국에서는 과거 1878년 비스마르크 수상이 주도했던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1890년에 폐지됨으로써 독일 사회민주당이 합법화됐고, 실제 선거에서 엄청난 득표를 기록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전복’이라는 전통적 변혁론 대신, ‘의회 활동을 통한 권력 획득과 점진적 개혁’이라는 환상이 퍼지게 됐다. 또한 제국주의 본국 정부와 자본가들은 식민지에서 착취한 초과 이윤으로 자국 노동자 일부를 매수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순치하고자 했다. 자본가들은 주로 숙련 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 간의 구별을 근거로 숙련 노동자들을 ‘노동 귀족’화했는데, 이들은 노동운동을 지배하며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기존 사회 질서의 안정을 희구함으로써 혁명보다는 온건한 개혁 노선을 채택하게 됐다.


그런데 제2인터내셔널의 주류를 이루던 시각은 ‘세계대공황으로 자본주의가 자동‧필연적으로 붕괴하리라’는 ‘철의 법칙’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이는 어떤 변화도 받아들이지 않는, 따라서 어떤 수정주의도 용납하지 않는 데카르트식의 합리론적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서 ‘경제결정론’의 대표자인 카우츠키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현실의 변화를 받아들여 사상과 실천을 수정해야 한다’고 제기한 이론적 경향이 ‘수정주의’다. 이렇듯 수정주의의 대표자인 베른슈타인의 입장은 근대 영국 경험론(기계적 유물론)의 경향을 띠게 된다(‘합리론’과 ‘경험론’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지난 연재 기사 “엥겔스, 맑스주의 논쟁사의 시작” 참고. 여기서는 다만 ‘합리론’이 감각적 경험보다 이성적 논리를 중시했고, ‘경험론’은 반대로 감각적 경험을 우위에 놓았다는 것 정도로 지적하고 넘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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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년 사회주의자 탄압법 폐지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의회 진출의 자신감을 가졌다. 그림은 합법화 이후 1893년 제국의회 선거를 기념하며 사회민주주의 계열 잡지에 실린 당시 삽화. 왼쪽 귀퉁이에 맑스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 wikipedia]



베른슈타인의 입장

: 근대 경험론의 경향


먼저, 대표적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의 입장을 살펴보자. 베른슈타인의 견해는 그의 책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1899년 작. 이하 『전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베른슈타인은 『전제』에서 맑스주의 기본 명제들에 대한 수정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는 칼 카우츠키, 빅토르 아들러, 로자 룩셈부르크(『사회개혁인가 혁명인가』) 등 당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정면으로 비판한 바 있다.


수정주의는 지난 연재에서 살펴본 엥겔스의 이중적 측면(엥겔스에게 이 두 측면(경험론과 합리론)의 결합은 기계적이다) 가운데 경험론을 강조한다. 가령, 베른슈타인은 『전제』에서 자신의 목적이 “사회주의 이론 속에 남아 있는 유토피아적 사고 형식과 투쟁함으로써 관념적 요소와 같은 정도로 현실적 요구를 강조하려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철저하게 근대 경험론의 경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현실’을 무척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 이론을 폐기하는 쪽으로 나아감으로써, 수정주의는 맑스주의의 가장 기본적 명제인 유물론과 노동가치론을 부정하게 됐다.



유물론과 변증법의 부정


엥겔스의 유물론이 내포한 근대 경험론적 경향과 근대 합리론적 경향 중에서 합리론적 경향을 강하게 부정한 결과, 베른슈타인은 근대 합리론의 결정체인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서도 강력히 반대했다. 이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내세워 ‘과학적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모순적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앞부분의 ‘과학’은 감각적 현실을 강조하는 ‘실증주의(감각적 경험과 실제 검증을 거친 것만이 확실한 지식이라 생각하며, 형이상학적 원리의 적용에 반대하는 조류)’로서의 과학이고, 뒷부분의 ‘과학’은 법칙적이며 이론적인 합리성‧체계성‧필연성‧보편성을 강조하는 완결된 ‘이론적 체계’로서의 과학이기 때문이다.


베른슈타인이 보기에 후자(後者)의 과학은 현실의 변화를 수용할 수 없는 완결된 필연적 체계로서, 현실 너머의 유토피아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현실’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어떤 원리나 법칙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칸트식으로 말하면 ‘물 자체’(物 自體: 칸트는 인간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현상으로서의 사물’과 달리, 인간이 온전히 인식할 수 없는 ‘사물 자체’의 존재를 주장했으며 이를 ‘물 자체’라고 불렀다)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나중에 ‘신()칸트주의 맑스주의’로 불린 ‘오스트리아 맑스주의’로 이어지게 된다. 이때 ‘물 자체’는 경험론적으로 해석되어 ‘이성으로는 결코 인식할 수 없는, 즉 규정할 수 없는 본질적인 것’으로서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칸트가 말한 ‘순수이성’이 파악하는 것은 ‘사실’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비현실적 가상’, 곧 ‘가치’의 영역으로서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그리하여 ‘비현실적인’ 것으로서 ‘유토피아적인’ 것으로만 남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칸트의 ‘정언명령’(그 자신 외에는 다른 어떤 목적도 갖지 않는 절대적‧무조건적 도덕법칙. 곧, 다른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자 올바른 것)으로서의 ‘실천’의 의미는 단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유토피아적인 측면으로만 해석되는 편협함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 결국, 이 ‘가상’은 파악할 수 없는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으로 ‘요청’되는 자리에 오른다.


이는 결국 사회계약론에 의한 국가(또는 법)의 절대성을 요청하는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이 계약론은 결국 공리주의(‘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근대에서 ‘만장일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는 공리주의가 ‘특정 시공간에서만 일반적‧공통적일 뿐인 것에 대해 마치 절대적인 것의 외양을 씌운다’며 엄청나게 비판했다. 결국, 칸트는 자신이 비판했던 것으로 되돌아가는 모순을 범하는 꼴이 된다(만일 칸트가 이를 알았다면, 아마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개량주의로 가는 길


베른슈타인이 ‘완결된 체계’로서의 유물론과 변증법을 부정한 것은 ‘완결된 체계’의 해체를 요구한 것이었다. 이는 근대 경험론에 기반한 것이었고, 기계론적 유물론으로의 퇴보였다.


이러한 베른슈타인의 견해는 기존 맑스주의(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주류) 유물론에 내재하던 목적론‧결정론적 측면에 대한 반() 편향이었다. 베른슈타인이 주창한 수정주의는 기존 맑스주의가 내세운 사회주의를 ‘현실을 넘어선 유토피아적 이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는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에서(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될)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베른슈타인을 ‘단죄’했던 독일 사회민주당 주류 역시 실천적으로 다를 바 없는 길을 걸었다. 다음 연재에서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어떻게 ‘토대와 상부구조’의 명백한 분리를 전제했으며 노동가치론을 부정했는지 밝히고자 한다. 또한, 카우츠키의 경제결정론과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어떻게 개량주의로 나아갔는지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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