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변혁정치

> 변혁정치

116_14_수정.jpg



김건수 

변혁당 학생위원회 비상대책위원장


“‘공정성’의 파도에 맞서,

청년‧학생이 ‘평등’의 정치를 

조직해나갈 것”



# 청년세대가 우리 사회에 ‘공정성’이라는 질문을 던졌다. 공공부문 정규직 청년 노동자는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이 공정성을 침해했다”며 분노하고, ‘젊은 의사’들은 “학생 시절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은 의사와 대충 공부한 의사”를 비교하며 공정성을 꺼내 들었다. 이쯤 되면 공정성이라는 단어는 ‘경쟁에서 이긴 자들의 몫’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운동의 방향은 언제나 평등과 정의를 향한 것이었다. 때문에 ‘공정성’의 탈을 쓴 경쟁의 파도는 운동의 기본이 무엇인가 묻고 있다. 이런 질문을 학생사회에서 마주하고 그 파도에 맞서 우리의 담론과 실천을 고민하는 변혁당 학생위원회 비상대책위원장 김건수 씨를 <변혁정치>가 만났다.



건수 씨는 조금 특이한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두 분 다 학생운동, 시민운동을 거쳐 시골에서 농사짓는 삶을 살았다. 덕분에 건수 씨는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기도 한 전남 벌교의 마을에서 자랐다. 건수 씨는 그저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고등학교는 인천 강화도의 대안학교로 진학했다. 부모님이 여러 대안학교를 찾다가 농사를 가르치고 책을 많이 읽히는 학교를 찾았다. 건수 씨는 별다른 뜻 없이 ‘대안학교에 가면 입시에 파묻히지 않고 지금처럼 마음껏 축구를 할 수 있겠지’ 하는 바람으로 진학했다. 실제 대안학교 생활은 행복했다.


“굉장히 행복했고 좋은 추억이 많아요. 한 학년이 20명씩 총 60명으로 이뤄진 학교였고, 구성원 전체가 함께 사는 공동체였죠. 선생님들도 전부 운동을 하신 분들이었고요. 한 선생님이 시를 자주 읽어주셨어요. 나름 이벤트처럼 5월에는 5.18 시를 읽어주고, 4월에는 세월호 관련 시를 읽어주는 식으로요. 낭독을 되게 잘하셨어요. 사실 우리는 표현하는 방법을 잘 배우지 못하잖아요. 자신의 감정을 듬뿍 담아 시를 읽어주는 그 모습과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선생님이 시 읽는 날을 기다리기도 했어요. 눈 오는 날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어주셨는데 그게 오래 기억에 남아요.”


2015년, 건수 씨는 한신대 국문과에 진학했다. 대안학교 공동체 같은 곳을 찾고 싶었다. 자연히 투쟁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고, 함께하게 됐다. 건수 씨가 입학한 해에는 한신대에서 학과 통폐합 구조조정으로 학생총회 등 학내 투쟁이 활발했다.


“1학년 때 학생총회가 아주 크게 열렸어요. 1학년은 꼭 다 가야 한다는 분위기였고, 정말 동기들이 다 갔어요. 총회 이후에 단식, 농성투쟁도 이어졌고요.”


그해에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투쟁도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 침묵 행진이 대규모로 이어졌지만, 진상규명을 향한 발걸음은 공권력에 가로막혔다. 매일같이 집회가 열렸다.


“거리투쟁이 신기하기도 했고, 유가족 요구를 경찰이 진압하는 게 너무 분노스러웠어요. 동기들과 매주 집회를 갔는데, 그때 우리 학교 선배들이 열심히 싸우는 모습이 좋았어요. 선배들과 친해지고 싶었죠. 그러다 무슨 모임을 제안받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이름도 없는 모임이었어요. 거기서 <국가와 혁명>을 첫 책으로 읽었던 게 생각나요. 같이 공부하고 집회 가고 하다 보니 그해 말에 총학생회 선거도 함께하게 됐어요.”



이어지는 학내 투쟁, 

정치적 고민의 거점으로 변혁당 가입


2016년, 건수 씨는 ‘한신 민주화를 위한 학생모임’에 함께했다. 구조조정, 총장 직선제 등 굵직한 교육투쟁 의제가 있었다. 대학 본부는 이사회 결과를 뒤집고 세 번째 득표자를 총장으로 선출했다. 200여 명의 학생이 이사실 점거에 들어갔고, 이를 경찰이 진압 시도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투쟁을 계기로 저와 동기들은 더 정치적인 사람이 되어간 것 같아요. 그러던 중 한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학내 투쟁을 잘하려면 정치조직이 필요하다고. 운동의 방향과 진로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 말에 동의해서 변혁당에 가입하게 됐어요.”


변혁당 첫인상을 물으니 건수 씨는 장단점을 하나씩 들었다.


“당에 처음 가입할 때는 민주당과 비교했어요. 당시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점하고 있었는데, 세월호 특별법 하나도 통과시키지 못하는 게 실망스러웠거든요. 의회 정치가 의미 없다고 생각했어요. 변혁당이 그 대안 같았고요. 한편으로는 문화가 후진적이라는 느낌도 있었어요. 저도 주변에서 청년 활동가들을 만나잖아요. 그에 비교해 뭔가 옛날 조직 같은 느낌? (웃음)”


변혁당 가입 이후에도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학내 활동을 이어갔고, 학번이 올라가면서 책임질 일도 많아졌다. 2019년에는 학내 총학생회 선거가 무산됐고, 비대위가 꾸려졌다. 건수 씨는 동아리연합회장이자 비대위 부위원장을 맡았고, 비대위를 인정하지 않는 학교에 맞서 투쟁을 조직했다.


“학교가 비대위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대표성도, 공식성도 없다는 거였죠. 그래서 학생총회를 열고 학생들에게 묻기로 했어요. 그때 ‘비대위도 일하고 싶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정말 열심히 조직했어요. 900여 명의 학생이 모였죠. 그런데도 학교 본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단식, 농성 등이 이어지면서 교수들도 우리 편이 되어줬어요. 본부만 고립됐죠. 2학기에는 본부 점거 투쟁이 있었고, 비대위원장과 제가 무기정학을 받게 됐어요. 징계 철회 투쟁을 했고, 그 과정에서 학생사회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지지하고 함께하는 사람이 늘었다는 점에서요. 아쉬운 건 정말 바꾸고 싶었던 ‘본부의 변화’ 자체를 끌어내지 못한 점이에요.”



청년‧학생운동 새판짜기, 

“공정성의 파도에 맞서 평등의 가치를”


학내 활동을 마무리하고 건수 씨는 올해 변혁당 학생위원회와 경기도당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쉽지 않은 조건이지만, 학생 당원들과 함께하는 사업을 찾고 있다.


“학생위원회 안에 분회가 줄었어요. 부동산, 기후위기 등 대중적 의제가 필요해요. 9월엔 학생운동 단체들에 기후위기 사업을 몇 가지 제안하고 조직했어요. 당원들이 의제 중심으로 함께 할 사업이 필요했어요. 가령 ‘기후변화가 아닌 체제변화’라는 글자를 모자이크로 함께 만드는 행동을 했는데, 큰 사업은 아니라도 당원들과 함께 실천하고 다른 단위와 함께 하는 경험을 만들고 싶었어요.”


건수 씨는 최근 ‘청년‧학생운동 새판짜기’를 제안했다. 어떤 ‘새판’일까.


“처음 문제의식은 교육투쟁이었어요. 학생회에서 활동가들이 정말 열심히 하고 그 사람들은 진보적인데, 정작 하는 일은 ‘사업을 이행하는 수준’이라는 거죠. 사람들과 호흡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이 생겼어요. 학생회 등에서 진보적 활동을 이어왔는데, 지금 청년들은 ‘공정성’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만들고 있잖아요. 우리는 어떤가요. 진보라는 게 뭘까요. 왜 아주 일부만 진보의 가치인 평등을 공유하게 됐을까요. 이 상황을 반성하고 우리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공정성’으로 둔갑한 경쟁 사회, 에너지의 방향을 바꿔보자는 데 생각이 이르렀죠. 우리도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자는 거예요. 집회나 학생회 사업에만 같이 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공정성’의 파도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가치로 평등을 말할 수 있도록 하자고요.”


건수 씨에게 사회주의 대중화 중간평가를 물었더니 “우리가 좀 더 움직여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회주의 대중화,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역량이 충분치 못하다 보니, 우리 당의 원래 강점도 약해지고 새로운 정치 공간은 아직 열리지 않은 느낌이에요. 답답한 상황이죠. 그래도 일단 우리가 움직여야죠. 중앙의 ‘완성도 있고 멋있는 기획안’이 사회주의 대중화인 건 아니잖아요. 분회와 당원 각각의 노력이 있어야 해요. 그런 것 없이 중앙 기획만 기다리다가 좋은 것 나오면 하겠다는 건 안 되는 일이잖아요. 우리가 꾸준히 당을 알리면서 사업을 하고 있어야 중앙에서 무슨 계획이 나와도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거죠. 지금은 사회주의 대중화 사업을 현장이 받을 수 있냐 없냐는 식으로만 논쟁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현장 혹은 대중이 ‘받을 수 있는 안’이라는 건 없어요.”


마지막으로 건수 씨에게 사회주의가 자신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학 입학 후 부모님께 재정적으로 도움을 거의 받지 않았어요. 방학에 아르바이트하면 온종일 일해도 5~6만 원 벌었죠. 큰돈 같으면서도 사실 친구들과 밥 한번, 술 한번 먹으면 없어지는 돈이에요. 알바한 돈으로 옷 한 벌 살 돈도 안 남는 거죠. 그런 면에서 사회주의는 존엄과 행복을 보장하는 그 자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 나위기관지위원회

© k2s0o1d6e0s8i2g7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