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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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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11.02 16:24

기획┃소비에트, 볼셰비키, 사회주의 혁명(上)


노동계급이 기억해야 할 

러시아 혁명


배성인┃서울(성공회대)



* 러시아 구력 기준 10월(신력 11월) 혁명이 발발한 지 103주년을 맞는 지금, 혁명 러시아와 소비에트, 볼셰비키를 둘러싼 평가는 여전히 극과 극으로 갈리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거론조차 찾아보기 힘든 게 오늘날의 분위기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대중 앞에 내놓기 위해서라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우회할 수는 없다. 계급의 기억이 복원되길 바라며, <변혁정치>는 이번 116호와 다음 호에 걸쳐 “소비에트, 볼셰비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주제로 기획 기사를 싣는다. 이번 호에서는 혁명이 대중의 열망에 근거했음을 밝히고 어떤 변화를 추구했는지 살피며, 다음 호에서는 혁명의 왜곡과 실패 과정을 규명하면서 앞으로의 사회주의 운동에 러시아의 경험이 주는 교훈을 확인하고자 한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누군가는 러시아 혁명을 떠올리지만, 다른 누군가는 80년대 대중가요 <잊혀진 계절>을 추억하면서 한 소절 흥얼거린다. ‘10월’이라는 공통점 외에 전혀 관계가 없는 이 둘을 억지로 버무리자면, ‘언제나 돌아오는 10월은 나에게 혁명의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혁명의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가 될 것이다.


20세기 최대의 사건으로 평가받는 러시아 혁명은 지금까지도 늘 평가가 엇갈린다. 근대 이후의 세계를 자유주의와 맑스주의 시각으로 나누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는 노동해방과 민중해방을 말할 수 없다’는 모든 사람에게 러시아 혁명은 해마다 혁명적 열정과 의지를 불태우게 만든다. 이들에게 러시아 혁명은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환희의 송가 그 이상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에게 러시아 혁명은 ‘100여 년이 지난 역사적 재앙’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에겐 혁명이 ‘세계를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러시아 혁명을 “혁명이라는 자랑스러운 명칭으로 장식되고 있는 광란제”라고 조롱한 것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정언명령에 가깝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유럽의 합리성을 자본주의 운영원리로 삼고 있는 베버에게, ‘러시아 혁명은 아마추어적이고 순진한 낭만주의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러시아 혁명의 진정한 교훈과 의미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쉬운 작업도 아니다. 혁명은 개념적 정의가 아니라 정치사상적 믿음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역사적 실체도 맹목적인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거짓이 된다. 이들 자유주의 세력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신념과 윤리에 충실하면서 순진한 낭만주의에 빠져 있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소수 볼셰비키 무장세력에 의한 봉기’ 때문이 아니다. ‘극심한 빈부격차가 혁명을 유발한다’는 논리도 단순하다. 그것은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혁명 당시 러시아는 농업국가였지만, 이와 동시에 산업화가 러시아 경제를 중대하게 잠식하면서 공업국가로 변모하고 있었다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그렇다고 혁명이 단번에 기습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러시아 혁명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정치적 축적’의 결과였다.



1905년의 총연습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은 혼합된 성격을 띠었다. 20세기 초 러시아에서는 대격변이 시작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농촌 인구는 70%나 증가했지만, 경작할 땅은 그만큼 늘어나지 않았다. 농민들의 지주에 대한 불만은 점점 커졌다. 농민에게 토지는 곧 가난이었다. 20세기 초부터 농촌 지역에서 반란이 빈발했다. 자연발생적이고 광범한 농민 반란은 러시아 전역에서 1907년까지 계속됐다.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도 농민과 별반 차이가 없다. 즉, 매우 비참했다.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남성 노동자의 2/3에 지나지 않았다. 짜르(제정 러시아에서 황제를 일컫던 명칭) 전제는 도시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은 물가 급등, 실업, 임금 하락, 지나친 군대 동원 등으로 인해 민중을 도탄에 빠뜨렸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라는 잔혹한 학살과 함께(1905년 1월, 노동자들이 짜르에게 빈곤을 호소하며 청원하기 위해 행진을 벌이자 군대가 발포해 유혈 진압한 사건) 러시아는 혁명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다. 1905년 5월에는 노동자민중이 “노동자 소비에트(‘소비에트’는 ‘평의회’를 뜻함)”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은 10월에 소비에트를 만들었고, 이를 계기로 러시아 각지에서 소비에트가 건설됐다. 혁명의 정점은 12월에 발발한 모스크바 노동자 소비에트의 봉기였다. 1905년 혁명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선출로 이어진 노동자의 반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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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을 묘사한 판화 [사진: wikipedia]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혁명의 불길이 치솟자, 짜르는 이를 달래기 위해 “10월 선언”을 발표하고 노동조합과 민간의회인 “두마” 도입을 약속했다. 언론‧집회의 자유 등 기본적인 시민권과 더불어, 정당 설립의 자유와 보통선거권 등도 약속했다. 1905년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봉기는 짜르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짜르의 권력은 절대적이었고, 귀족들은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05년 혁명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1905년 혁명은 노동계급이 세계사의 중심에 서는 계기가 됐다. 더불어, 러시아가 세계혁명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노동자 소비에트를 통한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반면, 짜르 전제가 혁명을 진압할 수준의 충성스런 군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이는 1917년 혁명과 대비되는 점이기도 하다). 레닌이 언급했듯, “1905년의 ‘총연습’이 없었더라면 1917년 10월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두 번째 혁명 

- 1917년 2월 혁명


1917년 2월 혁명은 1905년 혁명과 동일한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 민중의 삶이 다시 피폐해진 문제가 컸다. ‘전쟁 반대’라는 요구는 전 민중의 일상이었고, 이는 곧 짜르 전제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노동자‧농민의 불만은 계속 고조했고, 이들은 파업과 투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1917년 2월 23일(신력 기준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집회. 이 시위를 시작으로 2월 혁명이 시작됐다. 여성 노동자와 주부 수천 명이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빵 배급 확대’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도시 곳곳에 붉은 깃발이 등장했다. 깃발에 적힌 구호는 노동자들이 빵을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나면서 구호는 ‘전쟁 반대’, ‘토지를 농민에게’, ‘구체제는 물러가라’, ‘노동자 소비에트 만세’ 등으로 늘어갔다.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결국 1917년 3월 2일 두마(의회) 의원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구성됐고, 3월 3일에는 짜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했다. 그런데 임시정부와 별도로 노동자와 병사들이 소비에트를 조직하면서, 이른바 ‘이중권력’ 체제가 등장했다. 아무튼 시위 발발 12일 만에 혁명은 성공했고, 이는 민중 스스로 주체가 되어 만들어낸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러시아 2월 혁명의 가속성은 놀라웠다. 그 뒤 같은 해 10월까지 “세계를 뒤흔든” 혁명의 진행도 역동적이긴 마찬가지다. 혁명 급진화의 동력은 모두 대중에게서 나왔다.


2월 혁명이 성공하자, 이전에 해외로 망명했거나 피신했던 혁명가들이 러시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스위스에서 급히 돌아온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방침을 세우기 전까지는 대중의 혁명적 분출을 이해하는 정치세력이 없었다.


처음엔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리던 레닌의 <4월 테제>는 5월이 되면서 차차 볼셰비키 당원들에게 수용됐다.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그리고 “전쟁을 중단하라”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가 이 구호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을 무렵에는 소비에트 체계가 새로운 활력을 얻었고, 볼셰비키는 그 분출구가 될 수 있었다.



드디어 혁명이 완성되다 

- 볼셰비키의 10월 혁명


1917년 초여름에 접어들며 러시아의 위기는 점점 고조했다. 많은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실업자가 늘어났다. 10배로 늘어난 화폐량 때문에 화폐가치는 폭락했다. 빵 배급을 기다리는 줄은 당최 줄어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권위가 약화하면서,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했던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졌다. 그러자 임시정부는 7월에 ‘간첩 혐의’로 볼셰비키를 고발했고,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했다. 이때 레닌이 쓴 책이 <국가와 혁명>이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승리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오직 사멸하는 과정인 국가, 즉 곧바로 사멸하기 시작하고 사멸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진 국가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 1917년 9월에 우익 군부를 대변하던 코르닐로프가 반()혁명 쿠데타를 일으켰다.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케렌스키는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했고, 정치적으로 커다란 권력의 공백이 생겨났다. 이제 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볼셰비키였다. 코르닐로프의 우익 쿠데타를 막아낸 노동자‧병사들은 파업과 시위를 더 강력히 조직하며 결속했다. 이때 ‘국민적 통합과 질서’를 요구했던 임시정부와 온건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레닌과 볼셰비키는 대중운동의 급진화에 조응하며 그것을 더 밀고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에 비밀리에 잠입해 10월 10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를 개최했다. 이윽고 10월 24일 저녁, 노동자 적위대는 수도의 주요 거점을 빠른 속도로 점거하고 임시정부가 있는 겨울궁전으로 진격했다. 저항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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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 10월 25일(러시아력 기준), 임시정부를 끌어내리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했음을 알린 포고문. [사진: wikipedia]


1917년 10월 26일 새벽, 겨울궁전의 작은 식당에서 임시정부는 종말을 맞았다, 10월 혁명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레닌은 각종 포고령을 발표했다. 가장 먼저 평화와 토지에 관한 포고령이 발표됐다. 이어 8시간 노동제, 교육부 창설, 은행 국유화 등 수많은 포고령을 내놓고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했다. 10월 26일, 드디어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됐다.



세계를 뒤흔든 

러시아 혁명의 교훈


러시아 혁명은 ‘권력욕에 불탄 볼셰비키가 우매한 대중을 선동’하거나 ‘소수의 음모적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게 아니었다. 10월 혁명은 대중의 급진적 분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군대와 공장의 투사들은 도시 지역의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볼셰비키를 강력히 옹호했던 실질적 혁명군이었다. 대중의 요구를 재빨리 알아챈 레닌의 능력과 대담하고도 결단성 있는 지도력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국내외 정세에 대한 분석과 직관력은 남다르며 탁월했다. 볼셰비키 조직의 일체감 형성과 엄격한 규율 등도 주효했다. 그런데 개인의 리더십과 조직의 일사불란함은 당의 구조와 운영 방식에 기인한다. 볼셰비키는 계급정당이면서 대중정당이었다.


통념과 달리, 볼셰비키의 엄격한 조직문화는 정치적 입장의 원칙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며 당의 운영은 민주적이고 개방적이었다. 조직 노선이나 방침, 전술을 둘러싼 쟁점은 늘 형성됐고, 자유롭고 활기찬 논쟁과 토론도 일상이었다. 레닌이 논쟁에서 승복하거나 물러선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수의 의견을 수용한 경우도 많았고, 이견이 발생하면 가능한 한 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려는 정신도 잊지 않았다.


70여 년 후에 러시아는 붕괴했지만, 혁명에 대한 레닌의 정의는 여전히 교훈적이다. 레닌은 “혁명은 하층계급이 과거 방식으로 살기를 원치 않는 것만으론 어렵다. 상층계급도 과거 방식으로 통치할 수 없는 상태여야 한다”고 했다.



* 참고자료


- 배성인, 『혁명의 세계 반란의 역사』, 나름북스, 2020.

- 에드워드 H. 카(유강은 옮김), 『러시아 혁명 1917-1929』, 이데아, 2017.

- 막스 베버(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정치』, 나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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