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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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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혁정치>는 이번 116호부터 “경로 이탈”이라는 꼭지로 독자 여러분께 여러 책과 영상 작품을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현실의 경로에서 이탈함으로써 현실을 다시 돌아보고,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지면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회주의와 

‘혁명의 현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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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는 책>

『레닌의 혁명적 사회주의』

- 마르셀 리브만(정민규 옮김), 풀무질, 2007.


이주용┃기관지위원장



103년 전 이맘때인 1917년 11월 7일(구력 10월 25일), 러시아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국민에게!>라는 포고령이 발표됐다. ‘기존 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했다’는 선언이었다. 전날 볼셰비키가 주도한 봉기는 성공했고, 이로써 사상 첫 사회주의 공화국의 막이 올랐다.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과 ‘레닌주의’는 이때부터 수많은 사람의 인식(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속에 ‘사회주의’와 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오늘날 레닌과 레닌주의의 입지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레닌 영묘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어머니 옆에 묻어 달라’고 했던 소박한 유언은 묵살됐고,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된 채 지금까지 전시되고 있다. 이 정도면 조리돌림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이렇듯 육신뿐만 아니라 레닌의 생각과 행동, 나아가 그와 그의 동지들, 그리고 소비에트로 결집했던 노동자‧농민‧병사 대중이 일궈낸 혁명 역시 마찬가지 취급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레닌에 대해 말한다는 것


한국은 물론이고 사회주의 운동을 다시 만들어가는 해외 몇몇 곳에서도 여전히 레닌과 레닌주의를 ‘거론하고 싶지 않’거나 ‘부정해야 할’ 무언가로 여기는 경향이 일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에 관해 면밀한 검토와 비판적 평가 없이 섣부르게 그저 ‘틀린 것,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흡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른 시공간에서 펼쳐진 일을 ‘지금 여기’에서 곧이곧대로 재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너무나 자명해서 굳이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다. 당장 레닌 본인도 ‘러시아의 경험을 다른 나라에서 있는 그대로 실행하려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를 꿈꾸는 우리에게 레닌과 레닌주의가 혁명의 성공과 더불어 실패로 귀결한 그 경험으로부터 여러 교훈을 남겼다는 점이다. 기존 체제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새로운 질서를 건설해야 했던 볼셰비키의 책무는 지금도 사회주의자들에게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게다가 ‘소련의 실패를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 하는 질문도 피해갈 수 없다. 레닌과 레닌주의의 성공 요인과 한계까지 진지하게 살펴볼 때, 진정 과거를 ‘넘어’ 새로운 사회주의의 길을 다시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레닌의’ 레닌주의


이번에 추천하는 책 『레닌의 혁명적 사회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역사 속에서 레닌주의의 성과와 한계를 세밀하게 파고든다. 그런데 저자가 달았던 원제는 『Leninism under Lenin』이었다. 풀이하면 “레닌의 레닌주의” 정도일 것이다(“레닌의 혁명적 사회주의”는 한국어 번역자가 새로 붙인 제목이다). 이는 레닌 자신의 ‘레닌주의’와 레닌 사후 ‘후계자’들이 만든 ‘레닌주의’가 다르다는 저자의 견해를 담은 표현이다.


이 책에서 레닌과 레닌주의는 박제를 떨치고 활기와 역경으로 가득한 생명력을 되찾는다. 가령, ‘레닌이 지령을 내리면 당원들은 기계처럼 척척 수행하는’ 식의 환상은 깨진다. 오히려 레닌은 러시아 각지의 상황과 당 활동이 지도부에 제대로 보고도 되지 않는 데 자주 답답함을 호소했고, 혁명 이전까지 불가피하게 해외 망명지에 둥지를 튼 당 중앙의 지침은 러시아 현지에 원활히 전달조차 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또한, 레닌은 당과 끊임없는 긴장 상태에 있기도 했다. 볼셰비키가 형성된 이래 온갖 굴곡을 거쳐 10월(신력 11월) 봉기와 새로운 권력을 수립한 이후에도, 레닌은 항상 당내 반대에 부딪혔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는 고압적 명령권자가 아니라, 당 중앙이 가로막으면 직접 당원들을 찾아가 지치지 않고 토론하며 설득했던 사람이었다.



혁명의 현실성


이렇게 보면 볼셰비키가 혼란과 이견으로 뒤덮였던 것 같지만, 결국 그들은 단일한 의지로 뭉쳐 혁명에 성공했다. 최초에 ‘볼셰비키’라는 정체성을 만든 규약안의 정신(‘당원은 당의 한 기구에 속해 활동해야 한다’)과 함께, 아무리 격렬한 토론을 벌여도 일단 결정을 내리면 복무한다는 ‘민주집중제’도 주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지적하듯)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고수하면서, 각 시기의 전술을 유연하게 구사하되 철저히 이 전략 목표에 종속되도록 했던 것이 ‘레닌의’ 레닌주의가 지닌 특징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죄르지 루카치는 ‘일상적 문제도 사회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 혁명의 계기로 연구하고 그에 대해 확고한 지침을 수립하며, 혁명이 현실태로 나타났을 때 주저 없이 실천으로 나선다’는 의미에서 “혁명의 현실성이야말로 레닌 사상의 요체”라고 썼다.


이 책은 레닌에 대한 미화를 거부한다. 하지만 레닌에게 나타난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것이 어떤 맥락과 상황 논리에서 비롯했는지 밝히고, 레닌 스스로 죽기 직전까지 그 문제들에 맞서 투쟁한 과정을 자세히 다룸으로써 진정 ‘레닌의’ 레닌주의가 그 이후와는 얼마나 다른 것이었는지 더욱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이 책의 치명적 단점은 바로 절판됐다는 사실이다. 현재로서는 도서관‧중고서점을 찾거나 소장자 등에게 빌리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수고로움을 감내하고 펼쳐볼 만한 책이라는 점은 틀림없으리라 믿는다. ‘박제된’ 레닌(주의)가 아니라 ‘혁명의 현실성’을 향해 살아 움직이던 레닌(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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