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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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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8.02.15 20:54

썩덩나무노린재

 

마을사람들과 수다를 떨다, 겨울나기가 힘든 시절의 얘기를 했다. 겨울나기 준비하는 게 일년 중 가장 큰 일이었다. 김장하고 연탄을 들여 놓으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연탄을 한꺼번에 들여다 놓을 여유가 없어서 날마다 연탄 한두 장씩을 새끼줄에 끼어 사들고 왔다. 그러다 새끼줄을 놓쳐서 연탄을 깨뜨리고는 눈물 짓던 얘기를 나눴다.

겨울나기는 곤충에게도 무척 힘든 일이다. 변온동물인 곤충은 기온이 내려가면 움직일 수 없다. 추위가 닥치기 전에 겨울나기 준비를 마쳐야 한다. 겨울을 나는 곤충은 한살이의 여러 시기(, 애벌레, 번데기, 어른벌레) 가운데 한 시기만이 겨울을 나는데 알맞다. 어느 곤충 종이든 이 시기가 추위를 견디는 내성이 가장 강한 때이다. 곤충이 겨울을 나는 곳은 다양하지만 모두 찬바람을 막아주고, 온도가 안정적이고, 습도도 적당하게 유지되는 곳이다. 겨울나기 좋은 곳을 제대로 찾지 못하면 얼어 죽거나, 배고픈 천적의 먹이가 되고 만다.

겨울을 나려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곤충도 있다.썩덩나무노린재는 언제부터인지 도시 아파트 베란다를 겨울 별장으로 삼았다. 가을이면 아파트 벽을 타고 오르는 썩덩나무노린재를 자주 본다. 틈새전문가는 창틀 틈새를 찾아 들어가 베란다 어느 구석에서 겨울을 날것이다.

썩덩나무노린재 이름에 나오는 썩덩나무는 어떤 나무일까? 그런 이름을 가진 나무는 없다. 썩덩나무는 썩은 나무를 이르는 것 같다. 짙은 갈색바탕에 무수히 찍혀있는 흰색, 검은색, 적갈색 무늬는 나무줄기를 닮았다. 그래서 썩덩나무노린재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썩덩나무노린재는 썩은 나무가 아니라 싱싱한 과일이 달린 나무에서 볼 수 있다. 썩덩나무노린재는 사과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 감나무 같은 과일나무를 두루 좋아한다. 썩덩나무노린재는 긴 주둥이를 과일에 빨대처럼 찔려 넣고 과즙을 빨아먹는다. 노린재가 빨아먹은 과일은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그런데 썩덩나무노린재는 얼마 전까지 과일에 피해를 주는 해충이 아니었다. 썩덩나무노린재가 갈색날개노린재, 톱다리개미허리노린재 따위와 함께 과수농가에 대표적인 해충이 된 것은 2000년쯤부터이다. 이전에 이 노린재들의 먹이식물은 주로 들풀이었다. 1990년대 후반 지구온난화로 날씨가 더워지고, 산림생태계와 농업생태계가 노린재가 살아가기에 좋은 환경으로 바뀌자 노린재 수가 빠르게 늘어났다. 수가 크게 늘어난 노린재는 콩이나 참깨 같은 작물에 피해를 입히더니, 2000년쯤부터 과일나무에까지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잡초를 먹어주어 농사에 이롭기까지 하던 곤충이 갑자기 농작물과 과수에 피해를 주는 신흥 해충으로 바뀐 것이다. 노린재가 수가 늘고 농작물과 과일에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 남미, 호주, 유럽 등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동아시아가 원산지인 썩덩나무노린재는 세계로 퍼져나갔다. 1998년 펜실베니아 앨런타운에서 발견된 낯선 해충 노린재를 본 미국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노린재 연구 결과도 없고, 천적도 없는데 통제가 안 될 정도로 불어났기 때문이다. 스위스 등의 유럽에 퍼진 노린재는 과일에 검은 반점을 일으켜 상품성을 떨어뜨리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작물을 사랑한 곤충/한영식/들녘]

썩덩나무노린재가 아파트에서 자주 눈에 띄게 된 것은 과일나무의 해충이 되고 나서부터이다. 아파트로 오기 전 썩덩나무노린재는 낙엽 밑이나 나무껍질 속에서 겨울을 났지만, 아파트 화단에는 낙엽도 없고 노린재가 들어가서 겨울을 날만큼 나무껍질 틈이 넓은 큰 나무도 없다. 썩덩나무노린재가 아파트에서 겨울을 나기에 좋은 곳으로 찾은 데가 바로 아파트 베란다 구석이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썩덩나무노린재는 해충이 아니다. 사람에게 직접 피해를 주지 않고, 열매의 질을 떨어뜨리지만 나무를 죽이거나 병들게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지구온난화 탓에 해충으로 바뀐 노린재와 사람이 피해없이 함께 살아갈 방법은 없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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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강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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