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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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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06.18 18:42

무관심이 만든 고립감에 관해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그즈음, 우리는 금속노조와 함께 일 년의 시작에는 ‘정세 영상’, 하반기의 시작에는 ‘교양 교육 영상’, 이렇게 2편의 영상을 작업했다. 정세 영상은 투쟁을 앞두고 급할 때만 하는 영상에서 점점 한 해의 정세와 사업목표를 전국의 조합원들과 공유하는 필수영상이 되고 있었다. 교육 담당 실무자들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면 자신들뿐 아니라 조합원들에게 보여 줄 정세 영상을 찾게 되고, 그 힘으로 우리는 정세 영상을 10년이 넘게 아직도 하고 있다. 정세 영상이 ‘알고, 함께 투쟁에 나서기’를 독려하는 영상이라면, ‘알면, 좋은 노동자로 거듭날 수 있다’고 유혹하는 작업이 바로 ‘교양 교육 영상’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한 가지 안내서>는 바로 한 해 전, 금속노조와 처음으로 교양 교육 영상을 만든 후 두 번째 작업(첫 번째: <1%의 노동자>, 2010년 제작)이었다.


금속노조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20여년 만에, 20년 전 투쟁의 주역들이 중심이 돼서 건설한 산별노조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노조는 조합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숱한 교섭과 투쟁으로 임금과 노동조건을 크게 향상시켰다.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건설 후 5년 정도가 지난 즈음 금속노조의 큰 고민은 물론 ‘이명박 정권의 극심한 노동 탄압을 어떻게 막아낼까?’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고 중요한 고민은 조합원들의 노조 무관심이었다. 당시 유행하는 말로,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을 동전을 넣으면 자신이 원하는 커피나 음료가 툭툭 떨어지는 ‘자판기’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합원들의 무관심 속에 자판기로 여겨지는 노조는 물 위에 홀로 떠 있는 섬이 되어갔다. 고립감은 갈수록 커졌다.


세상에 꼭 알아야 하는 일들이 많고 많지만 그 중에서 ‘내가 노동자’라는 것, ‘노동조합은 또 다른 나’라는 것을 선언하면서 시작한 <세상을 살아가는 한 가지 안내서>의 테마는 ‘노동조합은 나의 것’이라는 점이다. ‘노동조합이란 뭘까’를 크게 세 단락으로 들여다봤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노동조합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가 첫 단락이다. 노조에 대한 왜곡된 시선부터 시작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폭력도 불사하는 조폭 집단, 내게 돈을 주는 것은 회사지만 회사에 더 많은 돈을 주도록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조직, 노조에 전화 한 통 하면 화장실에 휴지가 생기고 식당에 반찬이 달라지는 자판기 같은 것, 노조 없이 당한 노동자의 비참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노조에 너무 감사하지만 내가 나서서 하는 조직은 아닌 걸로.


노동조합이 노동조합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투쟁과 희생이 있었는지, 그것이 일터에서뿐 아니라 나의 삶 전체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두 번째 단락이다. 독일 초·중·고등학교에서 필수로 노동권 교육과 노사관계 수업을 하는 이야기, 영국 노동자의 단결권 쟁취 투쟁 이야기, 프랑스와 스웨덴의 연대임금제 이야기, 그리고 한국의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야기 등을 통해서 말했다. 세 번째 단락은 조합원 500명의 금속노조 두원정공지회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이 두원정공 노조를 통해서 ‘노동조합은 나의 것’이라는 테마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두원정공은 노동조합의 모범사례다. 우리는 두원정공 노조의 일상을, 실제 벌어지는 일들과 두원정공 노조 사람들의 인터뷰를 며칠간 따라붙어 촬영했다. 임단협 요구안을 만들기 위해 어떤 회의와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는지, 그것을 얼마나 민주적으로 진행하는지, 일터에서 조합 간부나 대의원이 아닌 일반 조합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을 직접 어떻게 개선해 나가는지, 공장 밖의 노동자들과 어떻게 연대하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글이 아닌 실제 현장의 모습으로 담아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노동조합은 최대한 민주적으로 조합원의 의견을 모으는 조직이라는 것, 조합원의 직접 참여로 운영하는 조직이라는 것, 다른 노동자들과 연대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조직이라는 것, 이렇게 노동조합에 관한 3가지 정의를 했다.


올해 30년이 되는 동안 우리는 거의 100여 편의 교육 영상물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몇 번은 우리의 한계를 조금은 뛰어넘는, 새로운 전환을 이루어내는, 그런 작업이 있었다. <세상을..>이 그랬다.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단정적이고, 술자리에서나 하는 단어들을 내레이션에 쓰고, 수십 개 노조 중에서 단 하나의 노조 사례를 전부인 양 말하는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당시 금속노조가 남에게 말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던 고민을 나름 품위 있게 드러내는, 모든 위험스런 요인들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새로운 쾌감으로 느껴지는 작품이 됐다. 아직까지 금속노조에서 가장 많이 배포하고, 교육담당자들이 대본을 찾기까지 하는 영상이 됐다.



* <세상을 살아가는 한 가지 안내서> 27분/2011년 8월/제작 금속노조, 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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