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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1880~1968


박제된 신화에 가려진

전투적 사회주의자


이주용┃기관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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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wikipedia]



1915년 12월, 35세의 청년 헬렌 켈러가 뉴욕의 한 연단에 섰다. 연설의 막바지에 이를 무렵, 그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는 족쇄 말고는 잃을 게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겐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67년 전 <공산주의 선언>의 끝자락에 기록된 이 존재감 넘치는 문구는, 이처럼 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와중에 ‘노동계급의 저항으로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한 이 학살극에 맞서자’고 주장한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의 입에서 되풀이됐다.


헬렌 켈러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물론이고, 그의 생전에도 사람들은 그를 ‘장애를 딛고 일어선 위대한 인간 승리’의 표본으로 박제하고 싶어 했다. ‘장애인’ 헬렌 켈러가 장애인 권리를 위해 벌인 사업은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칭송하면서도, 그 헬렌 켈러가 공공연히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밝히며 혁명을 주장한 데 대해서는 모욕이나 비난, 혹은 침묵과 무시로 애써 덮었다. 그들은 세칭 ‘기적의 소녀’라는 틀 속에 88년의 삶을 가두려 했지만, 이 속박을 거부하고 정열적으로 노동계급의 단결과 해방을 외쳤던 것은 헬렌 켈러 자신이었다.



“나는 붉은 깃발을 사랑한다”


헬렌 켈러는 어릴 때부터 유명 인사였다. 생후 19개월 만에 병으로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었음에도 7살에 선생님 앤 설리번을 만나 글자를 배운 이야기는 당대에도 놀라운 사건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그가 1900년 시각-청각장애인 최초로 대학에 입학한 일도 화제였다(이는 거꾸로 장애인의 교육 접근권이 대단히 부족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랬던 헬렌 켈러가 1909년 미국 사회당에 입당하고 공개적으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니,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세간의 시선이 쏠렸다. 그가 “자본가 언론”이라고 부른 매체들은 헬렌 켈러 본인을 공격하기엔 께름칙했던지 “가여운 헬렌 켈러는 그를 이용해 명성을 얻으려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한 헬렌 켈러의 답은 1912년 발표한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라는 글에 담겨 있다. 그는 앞의 적대적 언론에 대해 “위선적인 동정”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다만 그들이 ‘착취’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며 비꼬았다. 또한 “나는 붉은 깃발을 사랑하며, 그것이 나를 비롯한 우리 사회주의자들에게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고 썼다. 2년 뒤 헬렌 켈러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사회주의가 이 세상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굶주리고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직장을 제공하고, 최소한 아이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사회주의자다.”



사회주의 당의 좌익, 그리고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일원


헬렌 켈러를 사회주의로 이끈 데에는 인도주의적 동기 혹은 그 자신이 강조했던 ‘인간에 대한 사랑’이 분명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는 거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헬렌 켈러는 미국 사회당 안에서도 급진적인 좌익이었다. 1912년경 미국 사회당은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 경향의 우익과 혁명적‧전투적 경향의 좌익으로 분열하는데, 헬렌 켈러는 후자였다. 한 인터뷰(1916년)에서 그는 우경화한 당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사회당은 정치적 수렁에서 침몰하고 있다. 정부 밑에서 자리나 얻으려는 당이 혁명성을 담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부는 사회당이 대변하려는 이해관계와는 정반대에 서 있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1912년 헬렌 켈러는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 노조활동가들이 주도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에 합류한다. IWW는 미국 사회당내 좌익의 근거지였으며, 전쟁 반대 운동을 비롯해 노동조합의 정치투쟁과 격렬한 파업으로 미국 노동운동의 급진적 주체임을 자랑했다. 또한, 미국 노동총동맹(AFL)이 백인 숙련공 중심의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노동운동을 대변한 반면, IWW는 이민자 출신의 다양한 하층 노동자들이 참여하며 계급성‧전투성을 강화했다. 그만큼 IWW 노동자들은 미국 정부와 자본가들의 가혹한 탄압과 린치를 겪었고, 심지어 조직적으로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헬렌 켈러는 1918년 발표한 글 <IWW를 위하여>에서 이러한 만행을 규탄하면서 IWW가 “이윤생산체제 자체에 맞선다”는 점을 강조하고,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산업을 소유‧통제함으로써 각자에게 온전한 자신의 몫을 배분해야” 하며, 그래야 “노동자가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을 투쟁하는 노동계급에 이입했다. “노동자들이 산업 노예로 남아 있는 한, 나는 자유로울 수 없다.”



자본주의와 억압에 맞선 사자후


“투쟁으로 쟁취하는 것일 뿐, 애초부터 신성한 것이란 없다”며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함께 싸워야 “자본주의를 끝내고 민주주의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던 여성운동가. 세계대전 한복판에서 “대중의 노동으로 이윤을 얻는 한줌의 소수가 자본가들을 위해 노동자들을 군대로 동원하려 한다”며 “전쟁에 맞서, 법과 제도에 맞서 파업하자”고 외쳤던 선동가.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하자 “내 어둠에 새로운 빛이 드는 것 같다”며 혁명을 지지했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혁명 러시아 침략을 “역사상 최악의 범죄”라고 규탄했던 급진주의자. 박제된 신화를 깨고 나오는 헬렌 켈러의 면면이다. 자신의 동료 사회주의자였던 유진 뎁스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서, 그토록 열망했던 그의 꿈을 읽어 본다: “혁명이여, 어둠을 가르는 화살처럼 재빠르게 오라!”



* 참고자료


- 도로시 허먼(이수영 옮김), 『헬렌 켈러-A Life』, 미다스북스, 2001.


- Helen Keller: Her Socialist Years(헬렌 켈러: 사회주의자의 기록), International Publishers, 1967. “맑스주의자 인터넷 아카이브(Marxists Internet Archive)”의 “헬렌 켈러 아카이브(Helen Keller Reference Archive)”에서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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