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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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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이후

세계 질서 재편 속 조선 민족해방운동 확산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1914년 7월28일부터 1918년 11월11일까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동맹국을 축으로 하는 전쟁이 벌어졌다. 전투원 900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참전국에서는 여러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1917년 10월 러시아가 혁명으로 새롭게 탄생하면서 전선에서 물러났다. 그 해 미국이 전쟁에 참여했고 1918년 독일을 제외한 동맹국들이 전선에서 물러났다. 11월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 독일제국은 무너지고 새로운 정부는 전쟁을 끝냈다.

세계 자본주의는 전쟁을 통해 성장했다. 영국의 경제를 따라잡으려는 독일의 중공업 발전 집중 정책이 크루프사Krupp GmbH 같은 거대 군수 업체를 키워냈다. 각국의 산업체들은 재빠르게 군수산업으로 전환했다. 미국의 제이피모건J. P. Morgan Co,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같은 금융회사들도 뛰어들었다. 이들은 유럽 여러 나라로부터 조달권을 따내는 대신 전쟁물자를 외상으로 살 수 있도록 금융지원을 해주고, 미국 기업에게 무기 생산을 할당하는 방식으로 군수산업을 키웠다. 전쟁에 나간 남성들을 대신하여 여성들이 일했다. 이때부터 여성들의 스커트가 짧아져 부츠에 닿을 정도 길이로 바뀌었다. 한편 일본은 극동지역 이권 확장과 국제적 지위 향상을 꾀하며 연합국에 참전했고 독일의 조차지였던 중국 칭다오를 점령하면서 입지를 넓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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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직후, 모스크바에서 레닌이 민중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민족자결’의 희망, 민족주의자들 고무

1차 세계대전은 두 개의 혁명을 남기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일찍이 자본주의가 시작된 유럽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싹터왔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계급과 결합해 국가권력과 생산과정을 장악하려는 투쟁을 벌여왔다. 1917년 러시아에서 인류역사상 최조의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러시아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호시탐탐 노렸던 나라다. 하지만 동아시아 진출이 가로막히자 발칸반도로 눈을 돌려 독일, 오스만제국과 분쟁을 벌이다가 세계대전에 참여했다. 세계대전 중 러시아 안에서 새로운 혁명 세력이 싹텄다. 제정 권력에 맞서 싸우고, 노동자 농민 병사의 힘만으로 권력을 쟁취하려던 세력이 제정을 뒤엎고 소비에트 권력을 세운 것이다. [강응천 김정 외, <근현대사신문>, 사계절, 2010]

러시아혁명은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8년 6월26일 러시아 지역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선인 최초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었다. 민족주의자들도 러시아혁명에 고무되었다. 박은식은 3.1운동 이듬해 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1917년의 러시아혁명이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여러 민족의 자유와 자결을 선포했으며 세계 개조의 첫 신호탄이 되었다고 평했다. 이 혁명을 통해 종래의 극단적 침략국가가 이제 극단적 공화국가가 되었다면서, 천지의 대변화가 일어났으니 한국도 활발히 맹진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프레시안,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10> 11.6 러시아혁명’)


농민·노동자투쟁 경험 축적…조선인 독립의지 고양

레닌이 제정러시아 치하 억압받는 민족과 동양의 모든 생산자를 대상으로 선언한 ‘민족자결의 원칙’은 억압받는 민족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연합국인 영국, 프랑스 등이 패전국의 식민지를 병합하는 것을 저지하고 국제연맹을 통해 식민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서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은 레닌의 선언을 의식한 것이었으며 내용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윌슨은 전승국이 지배하는 식민지를 뺀 일부 패전국의 식민지 또는 이 전쟁에 이바지한 일부 약소민족에 국한된 ‘민족자결’을 말한 것이고, 레닌의 그것은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민족의 자유로운 자결권’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처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우리와 관계가 없는 것이었음에도, 나라 안팎의 민족주의자들에게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 곧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고 3.1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족주의자들은 ‘대내외의 독립선포, 일제에 대한 독립 청원, 열강에 대한 독립 호소’로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제국주의 열강들은 전승국 일본 식민지인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

한편 국내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비밀결사운동,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투쟁이 증가하고 있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의 저항, 세금의 확대 강화에 대항한 납세 거부투쟁이 이어졌으며 1910년대 후반에는 식민지 지배 자체를 반대하는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해마다 늘었다. 1912년 6건(조선인노동자 1,573명 참여)이었던 노동쟁의가 1918년에는 50건(조선인노동자 4,442명 참여), 1919년에는 84건(조선인노동자 8,283명 참여)으로 늘었다. [이계형·전병무 편, <숫자로 본 식민지 조선>, 역사공간, 2014]

전쟁과 혁명으로 새롭게 재편되는 세계질서 속에서 조선인의 독립에 대한 의지는 높아갔고 안으로 민족해방운동의 확산과 농민·노동자의 투쟁 경험이 3.1운동의 기운을 모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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