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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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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 2015.05.15 15:53

김충선반월시화공단 노동자


흡연장의 형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굳이 말이 필요 없는 날이기도 하고, 애써 꺼내봤자 서로가 속만 상하는 날이다. 멍하니 담배연기만 내뿜고 있는데, 22살 막내가 적막이 답답해선지, 아니면 우리가 답답해선지 말을 건넨다. "형님, 노동자의 날인데 우린 안 쉬어요?" 안 쉬냐고? 이제 그런 걸 더는 궁금해 하지 않는 형들이 고개를 돌리며, 그 다음 서열의 현명한 대답을 기다린다. 박사라고 불리는 형이 연기를 피해 인상을 찡그리며 답해준다. "우덜은 노동자가 아닌갑지"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몇 마디 더 하려고 입맛을 찹찹 다셨는데, 어깨만 출썩거렸을 뿐, 담배를 매섭게 털어 끄고는 들어가 버렸다. 5월, 노동절 아침이다.몇 해 전에는 볼펜이 날아왔다. "X까!" 노동절 특근을 묻기에 쉬겠다고 했더니 “법정공휴일인데…”라는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관리자는 볼펜을 집어던졌다. "새끼야 니 맘대로 해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며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저기 옆 라인에서 또 고성이 오갔다. 누님 한 분이 엉엉 울고 있었다. 새파란 녀석이 또 특근을 강요하면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늘어놓은 것이다.

사나흘 뒤 월례조회 때 공장장은 전 직원 앞에서 부탁이면서 핀잔이고, 또 강요 같은 말투로 "관리자들이 다소 억지로, 강압적으로 특근을 부탁해도 이해해야지,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했다. 이듬해도 노동절 특근을 거부했지만 역시 폭언과 욕설을 들어야했다. 한 해 두 해 그렇게 지나가면 노동절이 되기도 전에 겁부터 난다. 또 무슨 욕을 들을까.

노동절은 꼭 쉬어야 한다던 그 누님이나 나나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체조를 하고 조회를 서고 있다. "노동절인데 나오느라고 누님 고생이 많소" "그래 너도 고생이다. 서울서는 민주노총이 파업 세게 한다며?" 자재 식별표를 만지작거리던 누님이 작은 목소리로 물어온다. "모르지, 센지 어떤지."

우리는 총파업, 노동절 대회에 모인 조직 노동자들을 우리와 얽힌 조직 노동자들에 비추어, 우리와는 뭔가 다른 노동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조직된 노동자란 딱 두 종류다. 우리 누님들이 명절 하루도 쉴 수가 없도록, 하루에 수십 씩 받고 연휴 전 기간 기계를 돌려버린 상위 2차 노동자들. 오작동한 기계에 손을 물려 신음하다 구급차를 탄 동료. 그 동료에게 삭을 대로 삭은 설비를 떨어뜨려주고 간 모회사 노동자들. 서울에 모인 노동자들도 2차나 모회사의 노동자들처럼 우리와 다른 등급이라서 저렇게 모일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근을 견뎌야 하고 낡은 설비를 받아야 하듯이, 조직된 노동자들이 파업도 하고 집회도 할 수 있게 누군가는 노동절에도 기계를 돌려야 하는데, 보다시피 그게 우리다.

높은 수당으로 특근을 잡고, 노후 설비를 이전한 것은 분명 자본이다. 그러나 자본을 욕하는 것은 왠지 터무니없는 것 같고, 남은 건 우리와 ‘같은 계급’인 조직된 노동자뿐이다. 우리는 그들만을 원망한다. 그러니까 원망스러운 이들의 대회다. 노동절 대회는. 곱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도 빼앗기고 있는데, 너희는 뭘 더 갖겠다는 거냐. 그들의 조직된 힘은 우리가 가져본 적 없기 때문에 조직된 이기주의처럼 보이고, 휘날리는 구호들은 한 번 외쳐본 적 없기에 허망한 약속이라고 생각한다. 뉴스가 경찰과 공방하는 노동자를 비추기라도 하면, 누군가는 어떤 빌어먹을 보수인사의 논평과 똑 맞아떨어지는 해설을 하고, 큰 교회에 다닌다는 기독교도 누님은 혀를 찬다. 우리는 멱살을 잡히고 욕을 먹어가면서 노동절을 이미 잃었거나 잃어가고 있다. 엉뚱하게도 같은 노동자들을 원망하며 기계를 돌리고, 그 원망이 결국에는 쓸모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저 조용히 외면할 뿐이다.

퇴근을 찍고 나오는데, 통근버스 주변이 소란스럽다. 우리는 다 출근했는데, 태울 버스는 한 대 뿐이다. 게다가 노선을 단축해 운행한단다. 한참 뒤에 사무실에서 나온 과장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엉뚱한 데를 두리번거리다가, 전화통을 붙잡고 인상을 쓴다. 출발 시간이 한 참 지나 다른 한 대가 도착했지만, 처음 온 기사님은 노선을 몰라 전철역 두 개만 찍기로 한다. 무슨 장난처럼 이 버스에 올랐다가 다시 저 버스로 갈아타기를 두 세 차례 끝에, 누군가 포문을 열었다. “노동자의 날 강제로 일을 시켰으면 곱게 보내지, 지랄이다.” “우리가 일분 늦으면 이 잡듯 하면서, 지금 몇 시냐. 교통비 내놓아라” 과장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지만 저쪽 버스에서 내린 누님들이 가세하니 그제야 죄송하다는 말이 나온다.

버스가 출발하고, 시끄럽던 모두가 이내 잠잠해졌다. 이 버스가 집으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덧없는 생각과 함께 나 역시 그저 잠잠해질 뿐이다. 노동절, 공단의 기계는 돌아가고, 우리는 몇 해의 노동절을 계속 이대로 보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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