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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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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 2015.05.15 15:54

박석준┃한의사(우천동일한의원장, 동의과학연구소장)


병이란 무엇인가?

서양의 역사에서 병에 대한 생각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조적 질병관이다. 이 관점에서는 병을 귀신이나 악령과 같이 몸의 외부에 있는 어떤 나쁜 것이 몸속으로 들어와 병을 일으킨다고 본다. 고대의 주술적인 의학이나 대부분의 근대 서양의학의 관점이 그러하다. 병은 밖으로부터 무언가 나쁜 것이 몸의 어딘가에 들어와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병을 보면 모든 병은 특정한 부위, 곧 구조와 연관된다. 오늘날 근대 서양의학에서 위암이니 대장암이니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요통을 ‘디스크’(추간판이라고 하는 구조)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병의 치료는 잘못된 구조의 치료, 곧 수술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다른 하나는 기능적 질병관이다. 병은 몸을 이루는 요소의 균형과 조화가 깨져서 기능의 이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4체액설을 바탕으로 한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가 대표적이다. 그 치료는 그러한 요소의 균형을 잡는 것이 된다. 체액설의 경우, 사혈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능적 관점은, 병을 고정적인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운동하는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구조적 관점과 차이가 있지만 기능의 문제는 항상 구조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체액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구조다) 결국 두 가지 관점은 서로를 배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같은 관점의 두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병’도 관계에서 온다

그러나 공동체를 위한 건강에서는 병을 관계의 문제로 본다. 생명을 생물학적인 관계와 사회‧자연적 관계의 총체로 보기 때문에 병 역시 그런 관계가 잘못된 데서 생긴 것으로 본다. 이를 표현하는 수단이 ‘기’이고 ‘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음양오행’이다. 따라서 병은 음기와 양기의 관계가 잘못되었거나 오장육부 사이의 기, 곧 장부 사이의 관계가 잘못된 것이거나 기가 흐르는 길이 잘못된 것이다.

또한 한의학의 고전인 <황제내경>이 성립될 때의 사전인 <석명釋名>에서는 병을, “타고날 때부터 갖고 있던 몸 안의 올바른 기(정기正氣)와 병을 일으키는 나쁜 기(사기邪氣)가 더불어 있는 것(병幷)”이라고 하였다. 병은 외부에서 들어와 몸 안에 자리 잡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몸 안에 있는 것이며, 그것이 외인이나 내인 등에 의해 드러난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암 세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몸속에 있었다).

병은 외부에서 온 것일 수도 있고 내부에서 생긴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요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외인(외부의 나쁜 또는 지나친 기)이든 내인(희노애락과 같은 정서의 치우침)이든, 아니면 불내외인不內外因(과로나 방사 과다)이든, 그 어느 것이든 그러한 원인에 의해 초래된 기의 상태, 곧 관계가 중요하다.


내가 맺어왔던 관계 돌아봐야

병은 지금까지 내가 맺어왔던 관계를 되돌아보는 계기다. 병의 치료는 곧 잘못된 관계를 깨닫고 그것을 고쳐가는 과정이다. 자연과의 관계에서는 내가 숨 쉬는 공기와 마시는 물과 음식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는지를 반성한다. 나아가 자연의 흐름을 벗어나 살고 있지는 않았는지를 반성한다. 생물학적인 내 몸과의 관계에서는 내 힘에 부치는 일을 하지 않았는지, 일어나 움직이고 잠드는 과정에서 지나치거나 모자란 일은 없었는지를 반성한다. 사회와의 관계에서는 무리한 관계로 마음고생이 지나치지 않았는지, 무엇보다도 내가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한다. 모든 병은 이러한 관계의 잘못에서 온 것이다. 병은 그러한 잘못된 관계를 고치라는 신호일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맺고 있던 관계를 반성하기는커녕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에 빠지거나 자신을 병들게 했다고 생각되는 모든 부분에 대해 분노하고 저주한다. 그리고는 병든 부분(구조)이나 기능만을 고치려 한다. 구조나 기능은 돈으로 고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근본 원인이 되는 병을 가져온 잘못된 관계는 돈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관계들을 잘못 맺어온 나 자신에 대한 반성과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자연과 사회 자체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인류가 자연과 부적절하게 맺은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해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런 자연과의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게끔 조직된 사회라면 당연히 그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소유와 독점으로 인한 집착과 경쟁으로 마음고생이 불가피한 사회라면 그 사회와 그 논리에 따라 집착 속에서 사는 사람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내 몸의 구조나 기능 또는 내 몸 안에 초래된 잘못된 기의 관계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공동체를 위한 건강은 모든 관계를 고쳐야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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