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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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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의 조직과 활동

“조선독립운동은 계속되고 있다”온몸으로 보여줘


김미화(노동자역사 한내)┃충북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항하여 독립을 갈망하는 민중이 참가한 거국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광범위한 민중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나갈 지도조직이 없어 운동은 분산적으로 벌어졌다. 민족대표의 비폭력운동에 한계를 깨달은 학생, 농민, 노동자 등이 투쟁을 주도하면서 폭력투쟁으로 나아갔지만 조직·무장하지 못함으로써 큰 희생을 치렀다. 이에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한 시위 참가자들은 1910년대 만들어진 독립군 단체에 참가해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독립군 세력과 김원봉은 일제와 전면전을 벌이기 전까지 군대양성의 현실적 한계를 인식하고, 먼저 단기적 성과를 낼 직접행동 조직이 필요함을 공감했다. 김원봉은 1919년 11월 윤세주, 이성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곽재기 등 13명과 중국 길림에서 의열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김원봉을 의백으로 추대했다. 의열단은 조선총독과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귀족과 대지주를 ‘7가살七可殺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및 일제의 중요기관을 ‘5파괴’로 규정하고 실천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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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선언 [출처 : 독립기념관]


명확한 이념·목표 가진 혁명단체 천명하고 실천

1920년 6월에 조선총독부 파괴계획이 미리 드러나 6명의 의열단원이 체포된 뒤에도 의열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9월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 12월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이듬해 9월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다. 1922년 3월 상해에서는 김익상, 오성륜 등이 일본군 대장 다나까를 저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사건은 상해는 물론 중국과 일본, 국내까지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테러수단을 이용한 독립활동에 유감을 표명한 미국의 태도로 외국여론은 악화되었다. 여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차 “폭탄사건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절대로 책임지지 않겠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그러자 의열단은 단원들이 사형당하고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있는데 임시정부가 격려는 못할망정 ‘관계없다’고 선을 긋고 나서는 데 격분했다.

의열단은 자신들이 무차별적인 테러단체가 아니라 명확한 이념과 목표를 가진 혁명단체임을 내외에 천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김원봉과 류자명은 북경의 신채호를 상해로 초빙해 의열단의 주의·주장을 담은 선언문 작성을 요청했다. 신채호는 민족해방운동을 약화·분열시키던 실력양성론, 외교독립론, 자치론을 비판하면서 조선 독립을 위한 민중직접혁명을 주장하는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여 의열단의 활동을 지지했다. 의열투쟁은 계속되어 1923년 1월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1926년 12월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지휘부)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가 인류를 압박하지 않으며 사회가 사회를 수탈하지 않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신채호 <조선혁명선언>에서 일부 발췌, 1923]

아나키스트였던 신채호는 1927년 9월 무정부주의자동방연맹에 조선대표로 참가했다. 동방연맹의 결의를 실천하기 위한 자금 조달에 나선 그는 대만인 아나키스트 임병문과 협의해 액면가 6만 4천원에 달하는 위조화폐를 일본, 대만, 조선 등 우편국에 발송했다. 이를 찾아 현금화하려고 대만으로 간 신채호는 기륭항에 도착했으나 체포됐다. 재판과정에서 자신은 “의심할 바 없는 무정부주의자”이며, “독립을 이루기 위한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기에 양심에 부끄럽거나 거리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927년 이후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운동에 집중

1925년 무렵 의열단은 테러를 통한 폭력투쟁이 민족해방운동을 조직적으로 벌이는 데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활동 방향을 찾아 중국 장개석 정부의 도움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해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1927년 4월 장개석이 반공·반소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이 깨지면서 의열단도 탄압을 받아 일부는 중국공산당에 가담했으나 대부분은 상해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의열단은 국내에서 망명해 온 안광천 등 사회주의자들과 손잡고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양성하고 국내로 들어가 사회주의자들과 힘을 합쳐 노동운동에 집중함으로써 사회주의 확산에 기여했다.

의열단은 엄혹한 일제 식민시기에 민중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끊임없이 불어넣었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목숨을 바친 젊은 단원들은 조선독립운동이 좌절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이덕일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사>, 역사의 아침

한상도 「김원봉의 생애와 항일역정」

이만열 「단재 신채호의 민족운동과 역사연구」

박걸순 「신채호의 아나키즘과 동방피압박민족연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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