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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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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을 계속할지 끝낼지에 대한 조합원들의 선택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최병승┃현대자동차 노동자


지난 9월21일 저녁, 사내하도급 관련 잠정합의가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조합원 총회에서 반대 60.1%로 부결됐다. 이 소식을 들은 동지들은 “살아 있네~” “재교섭은 언제하나” “선거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2004년부터 12년 동안 진행해왔던 현대차불법파견 투쟁의 운명을 결정했던 일주일이 지나갔다. 하지만 투쟁했던 긴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 조용한 일주일이었다. 정치조직들의 논평도 찾아보기 어려웠고, 내부의 비판도 날 서지 않았다. 함께 침묵한 사람으로서 나 역시 많이 부끄럽다. 그럼에도 미안한 마음과 새로운 가능성을 품으며 9.14 잠정합의를 둘러싼 얘기를 해보려 한다.


반복된 오류, 8.18합의보다 못한 9.14합의안

현대차 불법파견투쟁의 출발은 2004년 5월27일 현대차비정규직 울산․아산지회가 총22개 사내하청업체(울산공장 12개, 아산공장 9개, 모비스 1개)는 불법파견이라며 노동부에 진정을 하면서부터다. 이후 현대차노조가 전주를 포함한 모든 생산하청업체(127개)를 불법파견으로 노동부에 진정했다. 노동부는 그해 12월, 127개 업체가 계약한 9,234개 공정 모두가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했다.

노동부 판정 이후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투쟁의 한길을 걸어왔다. 2005년 1월 파업투쟁을 시작으로 같은 해 8월 투쟁이 있었다. 하지만 대량해고와 류기혁 열사의 죽음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2006년 비정규직 독자적으로 라인을 세우는 3개월간의 파업투쟁이 있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2010년 7월 대법원 판결이 있었고, 집단조직화 이후 ‘25일간 CTS 점거파업’을 진행했다. 눈물을 머금고 점거파업을 풀면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패배하지는 않았다”는 심정으로 해고자들은 양재동 노숙농성, 철탑농성, 단식농성, 현장파업 등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2014년 8월18일 현대자동차비정규직 아산․전주지회가 ‘소송취하․신규채용을 전제로 한 사내하도급 관련 합의’(이하 8.18 합의)를 했을 때에도 ‘쓰레기 합의’로 규정하고, 포기하지 않고 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거제․부산 희망버스가 있던 9월12일, 10시간이 넘는 마라톤협상 끝에 현대차불법파견 관련 의견접근 안이 나왔다. 의견접근 안은 8.18합의의 문제점을 그대로 갖고 있고, 불법파견 관련 추가요구와 소송을 원천 봉쇄했다. 비공개합의서를 작성한 것도 동일하다. 이틀 뒤 진행한 본 교섭에서 연속2교대수당은 임금체계및통상임금개선위원회 결과에 따른다는 조건을 추가하며 잠정합의가 이뤄졌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집행부는 16일 설명회에서 손해배상과 고등법원 소송 결과를 확신할 수 없어 합의내용이 부족하지만 수용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8.18 합의 이전에도 손배는 있었고, 지방법원 판결도 예측 불가능이었다. 아산과 전주가 그랬던 것처럼 울산도 동일한 오류를 범했다. 사측은 태도를 바꿨다. 모든 투쟁주체가 무너진 상태에서 더 많은 것을 밀어붙였다. 결국 9.14 잠정합의서에는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정리한 내용이 없었다. 모든 것을 다 내줬고, 쓰레기로 규정했던 8.18 합의보다 더 못 한 잠정합의를 도출했다.


총회결과 따르도록 합의한 점은 유의미

많은 문제가 있는 잠정합의를 한 집행부지만 내용과 무관하게 민주적 의사결정 역시 집행부의 몫이다. 노동조합은 내용만큼 형식과 절차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8.18 합의 이후 아산과 전주지회가 보인 모습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지회 집행부가 효력이 발생하는 잠정합의 안에 서명을 거부하자 사측은 결국 총회결과를 적용하겠다는 문구를 삽입했다. 지회는 설명회를 진행했다. 또한 비공개합의서를 낭독하고, 열람했다. 현대차지부에서 조합원․쟁대위 설명회을 제안했으나 거부했고, 총회 일정을 앞당기자는 제기에도 반론권 보장을 위해 규약이 정한 7일을 유지했다.

투표 날이 돼서야 총회 결과와 상관없이 효력을 갖는 합의내용이 공개된 8.18 합의 때와 달리 조합원 총회 결과에 따라 재협의 또는 새로운 협의를 가능하게 잠정합의서를 작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 조합원들이 총회 전에 합의서 뿐만 아니라 합의내용에 대해서도 직접 문의할 수 있는 공간(설명회)를 마련했다. 그래서 조합원들은 12년을 끌어온 불법파견 투쟁을 연장할 것인지 마무리 할 것인지를 심사숙고할 수 있었다. 결국 통합사업부를 제외하고 모든 사업부 조합원들의 다수가 잠정합의안을 거부했다.

8.18 합의가 그랬듯 9.14 잠정합의도 투쟁이 없다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투쟁을 하기에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너무 지쳐있다. 길게는 12년, 짧게는 6년 동안 싸우고 또 싸웠기 때문이다. 부결 이후 재교섭이 될지 재투쟁이 될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현대차비정규직직지회가 지금보다 더 험난하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남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합의 이후 한 동지는 “우리가 지키려고 한만큼 세상 사람들이 지킬 수 있게 도와줬냐?” 물었다. 손해배상도, 형사처분도, 벌금도, 해고자 생계비도, 투쟁도, 동지끼리 주고받은 상처도 모두 지금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감수하며 싸워왔는데 도대체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며 눈물까지 흘렸다. 또 다른 동지는 “정규직 상승운동으로 끝났다”며 운동적 가치를 남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부결된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9.14 잠정합의가 남긴 소중한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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