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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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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호┃광주지역 활동가


한국 현대사에서 민중 항쟁의 상징인 ‘광주518’이 어느 덧 35주년이다. 그동안 민주화운동이라며 국가기념일이 되었고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발포 명령과 미국의 역할은 여전히 안개속이다. 정확한 진상규명을 위해 또 다른 투쟁과 노력이 요구되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와 북한군 투입설 유포 등 보수세력의 만행은 광주518이 여전히 진행 중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핏빛 항쟁의 주역은 바로 노동자들

광주518은 대학생들의 시위 진압에서 촉발됐기에 많은 이들이 518의 주역으로 학생들을 꼽는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료들을 검토해볼 때 노동자들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518 당시 확인된 사망자 212명중에서 직업 미상자 75명을 제외한 137명 중 노동자들이 71명(52%)이나 된다. 시민군으로 불리는 기동타격대 소속 구속자의 77%가 노동자들이었으며 경비대장 김호성은 식당 종업원이었고 기동타격대장 윤석루는 자개조각공이었다. 또한 부상자의 43%, 구속자의 50%가 노동자들이었다.

또한 들불야학의 노동자들은 투사회보를 제작․배포하고 보급조로 활동했으며 전방과 일신방직의 여성노동자들은 보급 활동에 참여했다.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생산한 장갑차 징발에 도움을 주었고, 버스, 택시 등 운수노동자들은 차량부대로 금남로에 진출하는 등 노동자들은 5월 항쟁의 당당한 주역들이었다. 항쟁의 도화선은 대학생들이었지만 항쟁을 이끈 주역들은 바로 노동자였음을 알 수 있다.


투쟁기관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역할

수습대책위의 안내를 따라 모든 무기를 회수하고 계엄군에게 투항해서 5월27일 도청에서 최후의 항거가 없었다면 과연 518은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윤상원열사가 마지막 활동을 벌인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무기 회수를 반대하고 27일 새벽, 도청에서 최후를 맞는다. 5월25일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결성되기 이전에는 명망가(신부, 목사, 변호사, 부지사 등) 중심의 518수습대책위가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은 계엄군과 타협을 벌이며 무기 회수를 추진했고 도청 1층 이외에 대해서는 공개를 거부했다. 5월 거리에서 대다수 광주민중들은 누가 적군이고 누가 우군인지를 알았다. 결국 도청 앞 분수대광장에서 벌어진 궐기대회에서 명망가들의 수습대책위는 대중적인 불신임을 받게 되며, 투쟁파를 중심으로 한 최후의 투쟁기관인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등장하게 된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기동타격대와 들불야학 노동자들, 열성적인 시민과 학생들이 주축이었다.

투쟁파와 수습파간의 대립과 갈등은 외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는 대중들과 호흡하면서 단련된 투사집단과 민중들의 진출을 두려워하고 더 이상의 확산을 차단하고자 하는 소부루주아 자유주의 세력 간의 갈등을 반영하는 것이며, 현실 사회운동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518의 마지막 투쟁기관인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점은 ‘죽음을 무릅쓴 단호한 투쟁정신’이다. 무기반납과 투항이 아니라 ‘도청 사수’를 결정하고 온몸을 내던졌기에 5월 광주는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현대사에서 518무장투쟁의 의미

4.19, 6월항쟁과 789노동자 대투쟁, 96~97총파업, 광우병 촛불, 세월호 등 수많은 현대사의 굴곡에서 민중들은 결코 총을 들지 않았다. 쇠파이프, 짱돌, 화염병이 전부였다. 그러나 광주의 518은 달랐다. 학살에 분노한 민중들은 살기위해 경찰서 예비군의 무기고를 접수했고 총을 들었다. 기동타격대와 시민군을 결성해 내부 치안을 유지하고 계엄군의 공격에 맞섰다. 그래서 518은 다른 운동과는 비교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다.

518이 총을 들었기에 민중봉기이고, 봉기를 의도하지 않았기에 봉기가 아니라는 식의 논란은 뒤로한다. 무장한 시민군의 등장은 향후 해방 사회를 건설하는데 민중의 물리적 힘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도 용역깡패와 공권력의 폭력 앞에 수많은 투쟁 현장이 난도질당하고 있다. 스스로를 지키는 것을 뛰어넘어 권력을 장악하고 새 세상을 만드는 것, 민중의 물리적 힘만이 모든 것을 결정할 뿐이다.


“반박근혜와 비정규직 철폐로 나아가자”

518기념식장과 묘역 안내원의 교육에는 군부독재의 유산을 물려받은 현정부와 새누리당에 대한 비판 한마디 없고 배후인 미국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세월이 흘러 518이 동학농민혁명이나 419처럼 역사속의 한 장면으로 남겠지만, 피어린 투쟁의 기억을 지우려는 자들이 있는 한 5월 광주는 계속되어야 한다. 박근혜정권 3년, 민주주의 말살과 세월호 진상규명 방해, 그리고 끝없는 부정부패, 경제적 불평등과 차별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보다 더한 정권이 또 있겠나 싶을 정도다.

노동자여! 518 35주기 핏빛항쟁을 가슴에 새기자. 대열을 가다듬고 대중의 바다로 가자. 지금보다 더 단호하게 ‘반박근혜’ ‘비정규직 철폐’의 길로 나아가자.

오월영령들이여! 투쟁의 현장에 부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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