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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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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 2015.07.15 13:10

기계보다 더 치밀하게 돌아가는 것


김충선┃반월시화공단 노동자


"에이씨,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젊은 남성 조장이 누님을 밀치자, 누님은 모서리에 나가떨어진다. 그럼 시키는 대로 하지, 알지도 못하는 걸 마음대로 할 리가 있나. 억울한 누님이 뭐라고 대구를 하려고 하면 조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아랫니를 드러낸다. 설령 기계가 잘못했다고 해도 그 앞에 여성노동자가 있었다면 그건 그 '여성'노동자의 탓이다. 여성은 손만 빠르고 꼼꼼하게 검사나 할 줄 알지, 설비는 잘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존재다. "야, 씨, 이거 불량 아줌마가 한 거지?" 불량이 나면 그건 공정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성노동자가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관리자를 비롯한 남성 노동자들은 '아줌마들이 일을 대충 해치워서 문제다, 아줌마들은 어쩔 수 없다'며 무시한다.

결코, 누님들 탓이 아니다. 작업교육에서 배제되는 한편 남성 노동자들이 정보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설비 조작에 대한 정보도, 공정 개선에 관한 권한도 모두 남성노동자들이 갖고 있다. 공정을 이해하려고 누님이 뭔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뭐! 왜!"하고 슥 지나가 버린다. 이건 이렇게 고쳤으면 좋겠다고 하면, 들은 체 만 체하다가 "안 되니까 그렇게 해놨겠지 되면 여적 그렇게 하겠어?"하고 무시한다.

남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을 멸시하고, 부차적 존재로 떨어뜨려 놓으면서 자기 지위를 확고히 한다. 여성노동자는 고분고분 시키는 것만 잘하면 된다. 남성노동자에게 뭘 멍하니 섰느냐고 욕을 먹더라도, 설비가 안 되면 일단 아무것도 만지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것이 여성노동자들의 역할이다. 누님들은 어쩌면 노동자로부터 한 단계 아래에 존재한다. 그저 하룻밤에 4000번 손목을 까딱거리는 자, 25킬로그램 이상의 무거운 코일뭉치를 교체하기 위해 매번 숨을 고르는 자, 이것들이 누님들의 정확한 지위다. 남성들이 떠밀고, 그렇게 떠밀려 나앉은 자리.

멸시와 차별의 대상은 관리가 필요하다. 여성노동자는 불량도 많이 내고, 그런데 뭘 자꾸 먹고, 왠지 물도 더 많이 마시는 것 같은데, 거봐 그러니까 화장실도 자주 가잖아? 가다마이 입는 것들이 2층 난간, '혁신은 3정5S' 따위의 꼴사나운 현수막에 염병 앓는 자세로 턱을 괴고 있다. 부장이 차장으로 차장이 과장으로 또 직장으로, 한 번씩 번이 바뀔 때마다 조장, 반장이 누님들에게 가서 뭐라고 한다. “전화는 어디서 온 거냐? 급한 내용이냐?” “화장실에 얼마나 있었느냐” “컨트롤박스 까봐라, 물병 가지고 들어오지 말랬잖아” 급한 전화가 아니면 오는 전화 받지도 말라는 건가, 전화통에 나 몹시 급한 전화니 받으시오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화장실은 똥 쌀만큼 앉아있는 거지, 가다마이 입는 것들은 스톱워치를 켜놓고 똥을 싸나. 어쨌거나, 여성노동자들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고, 또 손짓 발짓을 해가며 해명을 해야 한다. 남성노동자들은 전화를 써도, 화장실에 다녀와도, 현장 정수기를 끌어안고 있어도 누가 쫓아가서 심문 같은 걸 하지는 않는다.

작년에는 작업 중 빈틈을 타 관리자 한 놈이 여성탈의실을 검열했다. 자물쇠가 없는 로커를 열고, 미처 처리하지 못해 넣어둔 불량을 끄집어냈다. 놈을 당장 잡아가둬도 시원찮을 판에 남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을 탓했다. "아줌마들은 왜 불량을 감추고 그러냐? 아줌마들 청소도 잘 안하는 것 같던데, 청소 한 번 잘했지." 감히 여성노동자의 로커를 열어젖힌 놈이나, 청소 어쩌고 한 남성노동자나 여성노동자를 뭐로 생각하는 걸까. 누님들은 누님들대로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누님들은 관리자들을 시어머니라고 부른다. 살모사, 하이에나, 개기름 같은 좋은 별명을 놔두고, 시어머니란다. 이층 난간에서 현장을 감시하거나 탈의실 로커를 까뒤집는 놈들의 꼬락서니가,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나무라는 독한 시어미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별명의 내력이야 어떻든 내쫓기는 며느리는 있어도 시어미를 내쫓는 며느리는 없다. 시어미의 권력은 절대적이고, 관계는 불변이다. 관리자들에게 붙인 별명은 불만과 적의, 조롱 대신에 감시와 통제를 어쩌지 못한다는 확인에 가깝다. 다른 건 확인이 되지 않는다. 확인이 되는 거라곤 서로에게 보내는 메시지. 누님들은 행복이라는 엉뚱한 낱말과 하트와 꽃들이 넘실대는, 어찌 보면 최면 같기도 한 메시지를 돌리면서 구겨진 서로의 마음을 펴주려고 애쓸 뿐이다.

다른 것들은 차별과 감시를 거부할 때, 확인될 것이다. “니들도 꺼내먹는 냉장고, 청소는 왜 우리만 하냐.” “점심시간에 휴게실 청소 안했다고 지적받는 건 왜 항상 우리냐.” “새끼야, 넌 뭔데 내 묶은 머리를 자꾸 건드리는 건데.” 온전한 한 시간의 휴식을 되찾고, 이젠 등 뒤가 아니라 내 앞에서 얘기하는 남성 관리자를 보면서, 관계가 틀어지는 불편과 해고의 위험이 그 자체로 두려운 것이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우리를 당당하게 만든다는 걸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냉장고 앞에 모여 누님들과 자두를 나누어 먹는데, 2층 난간의 가다마이가 우릴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를 차별하고 감시해서 돌아가는 공장, 어쩌면 기계보다 더 치밀하게 돌아가고 있는 그것을 우리 모두가 다 거부하고 맞설 때까지, 우리는 계속 빨간 자두 알 같은 걸 나누고, 키득거리고, 또 웅성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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