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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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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 2015.08.01 15:24

1920년대 원산 부두 노동운동의 전개


201┃노동자역사 한내

*201은 글쓴이의 필명입니다.


식민지 조선의 개항장에서는 관의 간섭 아래 봉건적 유대와 온정주의적 노동관계(고주(고용주․객주․자본가)–십장-노동자)의 임노동이 발전했다. 부두노동자는 알선료 명목으로 임금의 10%을 내고 객주조합의 십장이 관리하는 도중都衆에 가입해야만 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 1919년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영향 속에서 조선노동공제회 직후 100여 개였던 노동단체가 1928년에는 500여 개로 폭증했다. 1920년 7월 ‘전국노동대회 원산지부’도 활동을 시작한다.(전국노동대회는 국채보상운동과 교육운동을 하던 김광제 등이 3,1운동 이후 1920년 2월에 만든 전국적 노동조직이다. 일제협력에 타협하는 등 내부 이견과 분열로 조직건설 외의 활동은 지지부진했다. 이 세력 일부는 이후 차금봉의 조선노동공제회와 함께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으로 합류한다.)

당시 원산 객주조합의 영향력은 ‘지부’를 해산시켜버릴 정도로 막강했고 1년 후의 노동회도 설립초기부터 객주조합의 감독을 받아야 했다. 1920년대 원산에는 십장제의 도중을 노동조합으로, 봉건적 유대를 근대적 연대로 바꿔나간 총파업의 역량을 키운 역사가 있다.


십장제 폐지․객주조합 압도, 원산노련 정치투쟁으로 진화

1921년 3월15일 원산노동회(초기회원 800~1,050명 추산)는 설립 후 노동자 일상에 밀착한 상호부조와 다양한 공제활동을 전개한다. 1922년 곡물부․잡화부를 갖춘 소비조합의 조직, 1923년 말 이발부 직영, 1923년 간이식당 개설, 회원의 질병과 사망에 대비하기 위한 규약저금을 시행했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이 발족한 뒤 6월에는 노동회도 규약에 “일치단결로써 노동운동에 헌신한다”는 조항을 첨가하며 △노동계급의 해방 △무산계급의 세계적 제휴 △ 노동자의 지식 향상 △노동자의 생활 향상 등의 내용을 강령에 담았다. 강습소나 노동야학 등의 연례화, 순회강연 개최, 신문과 잡지 발행도 꾸준했다. 1925년 1월 노동회는 드디어 객주조합을 상대로 한 임금인상 파업을 승리로 이끌고 창립시 체결한 ‘객주조합의 지휘감독을 받는다’는 약정서 조항을 폐기시킨다. 11월 노동회의 총회에서는 각 세포단체 40여개 도중을 직업과 장소에 따라 결복, 운반, 부두, 운송 등 7개 노동조합으로 나누고, 원산노동연합회(이하 원산노련)로 개칭한다. 당시 전국 노동운동의 일반적 발전 경향대로 인쇄, 목공, 양화, 이발, 양복, 짐수레노조 등 직업부문까지 포괄하여 원산노련은 지역 연합체로 발전했다. 그 규모는 해륙운수 노동자들의 운송부 약 1,800여 명과 직업 노조의 직공부 400여명을 합한 2,200여 명으로 원산 노동자들을 거의 포괄한 것이었다. 1925년 이후 크고 작은 20여회의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다. 게다가 1927년부터는 당시로서 보기 드물게 노동병원을 직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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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노련의 직영노동병원 제1호 진료실 일부. 동아일보 1929년 2월1일자. [김경일 <한국근대노동사와 노동운동>]


1925년 1․,2차 조선공산당 검거로 사회주의 세력이 위축되기 전, 서울청년회파의 원산노련은 사회주의운동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화요파를 견제하기도 했다. 1926년 정우회선언과 함께 사회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간의 통일전선체인 신간회, 근우회를 결성시킨 3차공산당 재건시기에는 원산의 제조직도 조직 통일에 노력을 기울인다. 1927년 2월에 원산노련은 원산사회과학연구회, 원산노동청년회와 원산사회단체협의회를 개최하고 3월에 조직을 정식 결성해 공산당 노선을 함께 할 방침을 결정한다. 원산노련은 특히 1927년 6월 총파업을 이끌며 3대 요구사항(노임을 시간에 따라 지불할 것, 담배와 술 등 제공 거부, 고주는 원산노련과 직접 계약을 맺을 것)을 내걸어 승리, 십장제를 폐지하고 단체교섭권과 단체계약권을 얻는다. 1927년 10월에는 원산노동청년회 등 4개 단체가 해체, 원산청년동맹으로 조직 통일을 진행했다. 그리고 1928년 1월에 원산노련은 “지방적 운동을 전국적 세계적 노동자와의 제휴로 확대, 협동전선을 확립하기 위해 신간회와 적극 제휴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중국혁명을 성원하고 노농 러시아를 모방하는 마크를 제정하고, 회관에 마르크스와 레닌의 초상을 걸어놓는 등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8시간 노동제를 확립하자’,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쟁취하자’는 정치적 권리 획득을 위한 슬로건을 내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계급적 연대의식의 발로이자, 경제투쟁을 거친 의식의 전반적 고양의 단계로 정치투쟁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대검거에 꺾인 정치투쟁…지도부의 급격한 변화

그러나 일제는 원산지역이 정치투쟁으로 상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1928년 2~9월 사이 일제는 조선과 만주 일대 200여명의 공산당원들을 검거․살해했다. 특히 1928년 3~7월에는 원산지역의 이계심, 한명찬, 장기욱 등 주요 운동가 모두를 검거했다. 조선공산당 조직은 와해됐다. 이 시기 원산노련은 급격히 급진성을 잃는다. 그 변화는 1928년 4월 원산노련이 총회 대신 대의원회를 최고기관으로 하고 부담금을 인상하는가 하면, 일반노동자의 자발성과 직접 참여를 제한하고, 경제투쟁의 양상을 강화하는 새 규칙을 제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도부의 변화와는 달리 원산의 노동자들은 또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으며 무엇을 원하고 있었을까.* 다음호에서는 문평제유공장에서의 파업을 발단으로 전개된 원산총파업의 진행과정에 관해 싣는다.


[참고자료]

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

김경일, <한국근대노동사와 노동운동>, 문학과 지성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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