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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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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7.06.01 21:18

눈물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19951213일은 전노협 해산 10일 후였다. 이즈음 전노협 사무실 안은 항상 냉기가 가득했다. 전노협이 해산된 후, 그동안 일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민주노총 혹은 금속연맹으로 뿔뿔히 흩어졌고, 마무리를 위해 몇몇의 사람들이 사무실을 오가고 있었다. 이날 아침, 여느 날처럼 전노협 건물 안은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 해 유난히 추었고, 이날은 햇볕도 없어 건물 안이 어둑어둑했다. 다른 건물보다 천정도 높고 계단 폭도 넓어 더 휑하고 썰렁한 계단을 지나 5층 전노협 문을 여니 냉기가 확 덮쳤다. 불어온 냉기는 다른 날의 그것과 달랐다. 냉기 속에 무거운 공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

 

해고자 조수원

무거운 공기는 새벽에 스러져 간 한 노동자의 주검이 싣고 온 것이었다. 4년 전 노조 활동과 관련해서 해고당한 노동자가 민주당사에서 목매 자결했다. 조수원,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마저도 진폐증으로 일을 그만둔 아버지를 대신해 살림살이를 떠맡느라 병역특례사업장에 취직한 것이었다. 당시 병역특례기간 5년 중 6개월만 남아있던 상황이었으나, 갑작스런 해고로 그는 다시 군대를 가야 했다. 기막힌 상황에서도 그는 동료들과 꿋꿋이 해고투쟁을 했다. 단식투쟁도 열심히 했고 전해투의 선전국장 일도 성심껏 했다. 그러나 4년여의 투쟁 끝에 그는 스물 여덟 나이에 죽음을 선택했다.

그의 주검이 방아쇠가 되어 완성된 작품이 바로 <해고자>*. 해산된 전노협 사람들 중 민주노총이나 금속연맹 등 여타 대중조직에 가지 않은 사람이 2명 있었다. 한 명은 전노협 백서 작업 때문이었고, 또 한 명은 노뉴단에서 영상담당자로 파견한 작업자였다. 그녀는 3년 전부터 시간만 되면 해고자 투쟁에 카메라를 들고 따라다녔다. 당시 촬영 매체인 16미리 비디오테이프로 상당한 분량의 투쟁을 기록해왔다. 너무 많은 촬영 분량은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한다. 너무 바쁘고 아직 미숙한 연출자는 이 많은 촬영 영상을 안고 어떻게 할 지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조수원의 주검이 없었다면 아직도 촬영상태로 있었을지 모른다.

<해고자>90분이나 되는 긴 작품이나, 그것에 담긴 것들은 비교적 단순했다. 조수원의 주검이 있던 당일 날을 시작으로 해서, 해고자들의 고단한 투쟁의 역사와, 장례투쟁이 담겨 있다. 거의 뉴스릴에 가까운, 만듦새가 거친 작품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투쟁 당사자는 두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는 내내 너무 울어서 눈이 붓고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하나의 투쟁에 집중한 이런 류의 장편 다큐멘터리가 거의 없었던 터라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기도 했고, 외국영화제에서 작품 초청을 받기도 했다. 사람들은 <해고자>를 통해 노뉴단이 뉴스 또는 교육 작업과는 다른 형식의 작업에도 많은 장점과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환기할 수 있었다.

 

마음으로 빛을 더한 작품

대개 창작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감정을 조직하는 데 나름의 재주가 있다. 그 감정이 어떤 색깔이든 감정이 잘 묻어나게 대본을 쓰거나, 어떤 감정의 쾌감이 문득 생기게 하는 촬영을 한다거나, 감정을 잘 흘러가게 편집하거나 혹은 감정을 착착 쌓아가서 폭발시키는 편집을 하거나. 아직 창작 작업 경험이 짧은 작업자에게 이것은 의도치 않게 얻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해고자>의 연출자가 그랬다. 그녀는 이 작업을 통해 자신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해고자>가 만들어내는 눈물은 그녀의 재능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오랜 시간 전해투의 투쟁을 함께 하면서 이미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묻어나는 열정적인 촬영이었고, 편집을 하려고 편집데스크에만 앉으면 매번 울기부터 시작하는 그녀의 마음이다. 그녀는 편집 내내, 어떤 말도 울지 않고는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조수원의 어머니처럼 울었고, 다시는 볼 수도, 말을 걸 수도 없는 조수원의 모습에 먹먹해진 가슴을 부여잡고 편집을 끝냈다. <해고자>를 보면서 사람들이 흘렸던 눈물은 그녀의 재능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확실히 마음은 재능에 우선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정든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그렇게 절실하게 원했음에도, ‘어머니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바랐음에도,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고단하고 쓸쓸한 삶에 비할 수 있을까. 조수원은 자결한 지 20여일 뒤인 199613일에 양산의 솥발산 공원에 묻혔다. 그곳에는 몇 년 전에 의문사한 한진중공업의 박창수도 있고, 이 해 봄에 분신한 현대자동차의 양봉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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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고자> 19966/90/제작: 조수원추모기념사업회-노동자뉴스제작단

: 1996년 제 1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출품작, 1997년 일분 야마가따 영화제 출품작, 1998년 프라이브르그 영화제 초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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