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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7.09.30 22:57

검은다리실베짱이

 

지름길을 피해 어슬렁어슬렁 돌고 돌아 텃밭으로 간다. 자꾸 빨라지려는 걸음을 붙잡아 세우며 느릿느릿 걷는다. 느리게 걸으며 길가 구석구석 숨어있던 것들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낸다. 길가에 지천으로 자란 개여뀌가 보이고, 분홍색 개여뀌 꽃이삭이 보이고, 꽃이삭에 붙어서 꽃을 먹고 있는 검은다리실베짱이가 보인다.

검은다리실베짱이는 위험을 느꼈는지 훌쩍 날아 몇 걸음 옆 강아지풀 더미 속으로 숨는다. 다시 살며시 다가간다. 검은다리실베짱이는 몸색깔이 풀색이라서 풀잎에 숨어있는 것을 찾으려면 잘 살펴보아야 한다. 몸은 강아지풀 잎사귀 끝처럼 늘씬하고, 기다란 뒷다리는 검다. 그걸 보면 왜 검은다리실베짱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쉽게 짐작이 간다. 검은다리실베짱이는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곤충이다. 천천히 걷기만 한다면 도시 한복판에서도 풀이 자란 곳에서 검은다리실베짱이를 만날 수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풀 속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검은다리실베짱이 수컷 앞날개가 시작되는 곳은 색깔도 검고 불룩하게 도드라져 있다. 이게 마찰기구인데 겹쳐진 두 앞날개를 비벼서 소리를 낸다. 베짱이는 종류마다 조금씩 울음소리가 다르다. 검은다리실베짱이는 찌잇-찌잇하고 짧게 운다. 실베짱이는 찌뜻---찌뜻---’ 운다. 조금 떨어져서 들으면 ------’으로 들린다. 줄베짱이는 츠츠츠츠츠하고 우는데 점점 빨라지다 끝에 가서 치르릇 특-치르릇 특-’하고 울음을 멈춘다. 베짱이는 쓰익-하고 운다. 멀리서 들으면 쓰익-쓰익으로 들린다. ‘쓰익-하는 베짱이 울음소리가 옛날 베틀로 베를 짤 때 나는 소리와 닮아서 베짱이라 불리게 되었다.

여름과 가을 수풀 속에서 울어대는 베짱이는 이솝우화에서 일 안 하고 노래 부르며 노는 게으른 곤충으로 나온다. 놀고 먹기만 했던 베짱이는 겨울이 닥치자 배가 고파서 개미를 찾아가서 구걸을 한다. 겨울 동안에 먹을 음식을 부지런히 모아놓은 개미는 게으른 베짱이를 비난한다. 누구나 다 아는 우화다. 그런데 우화가 그냥 우화로 그치지 않는다. ‘가난한 것은 베짱이처럼 게으르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서는 개미처럼 일하라.’ 우화가 현실을 판단하는 근거로 끊임없이 불려 나온다.

하지만 우화는 현실과는 많이 다르다. 수컷 베짱이는 부지런히 날개를 비벼 울음소리를 내서 짝을 부른다. 짝짓기하고 알을 낳은 베짱이는 겨울이 오기 전에 죽는다. 땅에 떨어져 죽은 베짱이를 개미들이 물어갈 것이다. 지난 여름내내 부지런히 일하던 일개미들은 대부분 베짱이처럼 겨울이 오기 전에 죽을 것이다. 겨울을 나는 개미들은 여왕개미와 가을에 번데기 껍질을 까고 나와 어른벌레가 된 젊은 일개미들이다. 그런데 개미들이 모두 부지런히 일하는 것도 아니다. 20~30%의 개미는 우화 속 베짱이처럼 놀고 먹는 게으름뱅이들이다. 모두가 우화 속 개미처럼 쉬지 않고 일만 하는 개미집단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다 죽고 만다. 게으름뱅이 개미는 일하던 개미가 지치면 대신 일을 시작한다. 베짱이처럼 놀고 먹는 개미가 있기 때문에 집단은 유지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어슬렁거리기가 힘들어진다. 걸음걸이가 자꾸 빨라진다. ‘조금 일하고 적게 쓰자, 그리고 삶을 즐기자는 삶의 태도를 지키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며 삶을 즐기자는 얘기는 가진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인 것 같다. 불안정노동자에게 하루하루는 벼랑 끝이다. 적게 벌어서는 살 수가 없는 세상이 되어간다. 적게 버는 것 자체보다 점점 커져가는 불안감이 문제다. “열등감과 불안감은 견디면 견딜수록 치명적인 질병처럼 인간을 힘들게 한다. 그야말로 영혼을 잠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염병처럼 퍼져나가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한다.”(김명인) 불안은 스스로를 일중독자로 만들어간다.

검은다리실베짱이는 다시 한 번 긴 뒷다리로 차고 올라서 저만치로 날아간다. 검은다리실베짱이를 쫓아가면서 불안을 떨치고 날아오르는 꿈을 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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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강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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