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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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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9.30 15:10

‘피해자 중심주의’ 

폐기를 위하여


김태연┃대표



문제제기를 받고 있는 

피해자 중심주의


사회변혁노동자당이 창당한 지 5년밖에 안 됐지만, 당내에서 결코 적지 않은 성폭력 및 성추행 제소 사건들이 발생했다. 최근에도 당원이 성추행 2차 가해로 제소돼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변혁당 3호 당규로 제정된 <성차별‧성폭력 근절 및 예방에 관한 규정>에 따라 제소 사건을 해결하고 있다. 이 당규는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 금지’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당규 제정 과정에서 이 원칙들이 마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원칙으로 인식해 온 ‘무죄추정주의’에 어긋난다는 문제제기가 있었고, 진실 규명을 위한 민주적 토론을 저해할 수 있다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심지어 당규를 제정한 지 5년이 지난 최근의 제소 사건에서도 피제소인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거론했다. 이처럼 변혁당이 당규로 피해자 중심주의를 원칙으로 세우고 대부분의 당원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아직도 당내에서 문제제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진보운동진영 내에서도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에 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민중공동행동” 대표자회의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그 경위는 이렇다. 금년 4월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가 성폭력 사건 2차 가해를 이유로 7월 1일부터 “노동자연대”와의 연대를 전면 중단한다고 결정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지난 9월 1일 민중공동행동 집행위원회에서 민주노총은 노동자연대와의 연대를 전면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민주노총의 이 제안에 변혁당을 비롯한 여러 단체가 동의를 표명했다. 이미 2017년에 민주노총이 여성사업에 국한하여 노동자연대와의 연대 파기를 결정한 바 있고,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조직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노동자연대와의 연대를 파기했다. 좌파단체 연대체도 노동자연대와의 연대 파기를 결정한 바 있다.


이제 민중공동행동에서 연대 파기를 결정한다는 것은 이러저러한 모든 연대체에서의 연대 파기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이후 민중공동행동 공동대표단회의에서 노동자연대의 소명의견을 청취한 후 10월 14일 전체대표자회의에서 안건으로 다루기로 했다. 지난 9월 22일 민중공동행동 대표자회의에서 민주노총 여성위원회가 그 취지를 다시 한번 소상히 설명했다. 그러자 노동자연대 대표자가 반박하는 발언을 했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부정하는 취지의 반론이었다.


한국 사회 전체에서도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공격은 거세게 진행되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성추행으로 고소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하자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공격이 빗발쳤다. 더불어민주당과 서울시는 ‘피해자’라는 용어를 거부하고 ‘피해호소인’, ‘피해호소 직원’으로 지칭함으로써 피해자 중심주의의 기본적인 취지조차 부정해 버렸다. SNS에서는 무죄추정주의를 주장하며 피해자 중심주의를 공격했다.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하여 조문을 거부한 진보정당 의원들에게 거센 비난이 가해졌고, 심지어는 수천 명이 탈당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폐기되는 

그날을 위하여


9월 22일 민중공동행동 대표자회의에서 민주노총 여성국장은 노동자연대의 성폭력 2차 가해 사건을 설명하면서 이런 얘기로부터 시작했다. ‘민주노총은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성폭력 피해조직이기도 하고 가해조직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가 발생한다. 그렇지만 다행인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 금지가 조직 전체의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이 원칙 덕분에 피해자들이 말할 수 있고, 미투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 금지 원칙은 성폭력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남발하는 법원 등 기존 체제를 넘어서는 진정한 진보운동이었다.’


강도를 당한 피해자에게 ‘왜 지갑을 들고 다녔느냐’, ‘왜 더 적극적으로 피하지 않고 칼에 찔렸느냐’는 식으로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그러나 유독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는 ‘옷차림이 어땠냐’, ‘좋아한 것 아니냐’, ‘왜 어두운 길로 갔느냐’, ‘적극적으로 저항했느냐’ 등으로 성폭력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게 이 사회의 현실이다. 여기에 ‘정조’ 관념, 권력관계, 조직보존논리 등 온갖 것들이 성폭력 피해자를 구조적으로 옥죈다. 이런 사회구조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생존과 사건의 합리적 해결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원칙으로 제기된 것이 피해자 중심주의이고 2차 가해 금지다.


한 개인이 어찌해볼 수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와 같은 유사한 원칙을 적용하는 예는 적지 않다. 불평등한 계급구조에서 자본주의 ‘계약 자유의 원칙’은 노동자들의 절박한 생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마음대로 해고(계약 파기)할 수 없다는 노동법 원칙이 통용되고 있지 않은가? 피해자 중심주의를 부정하고 무죄추정의 원칙 운운하는 것은 해고 금지에 대해 ‘계약 자유의 원칙’ 운운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수준의 억측이다.


변혁당도, 진보운동진영도, 한국 사회도 성폭력 없는 성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물꼬를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물길을 막는 장해물은 많다. 그것은 성폭력으로 인한 피해자의 고통, 나아가 인류의 고통이 더 길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위해 투쟁한다. 피해자 중심주의 같은 원칙이 필요 없는 그야말로 성평등한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이 피해자 중심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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