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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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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7.06.15 17:19

87년 체제와 주택금융화 (1)

 

송명관참세상연구소()

 


올해는 6.10항쟁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6월 항쟁으로 이뤄낸 민주화라는 시대이념은 민주시민이라는 정치적 주체 상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그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우리사회에 노동자계급이라 인식할 만한 어떤 주체적 상징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소위 ‘87년 체제라 불리는 사회변화는 두 가지 주체의 상을 만들어 냈는데, 정치적으로는 민주시민이고, 경제적으로는 중산계층이라 각각 칭할 수 있다. 그래서 80년대부터 확대되기 시작한 중산층 신화 만들기가 어떻게 노동자라는 주체성을 대체했는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노동자 집단성을 대체한 중산층 신화 만들기

제대로 된 복지체계가 없었던 산업화 시절, 복지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은 알뜰히 모아 둔 저축과 주택이었다.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는 내 집(주택)은 아주 유용한 복지수단이었다. 그러나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도시로 몰려든 이주자들이 내 집을 장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사회에서 가계 자산증식의 주요한 도구는 주택이다. 가계 자산구성에서 부동산은 거의 절대적인 비중(70%)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부동산에 대한 열망은 불패신화라는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대중에게 매우 강한 주체의식을 형성해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한편에선 부동산 투기를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그 대열에 동참할 기회를 잡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의식이 잠재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87년의 민주화 열기는 대중들에게 잠복되어 있는 경제적인 내적 갈등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지배계급도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분배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중산층 육성전략을 전격적으로 추진했다. 소위 내 집 마련의 꿈으로 대변되는 대중의 경제적 상승 욕구를 담을 그릇과 도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편 복지의 대용물이었던 근로소득세 감면과 저축 장려 정책은 개별적인 생활보장수단에 대한 선호를 낳았는데, 중산층 육성 전략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제도적 조건과 사회적 선호를 반영하게 되었다. 국가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는 대신 자산 형성 촉진과 같은 금융적 방식이 부상한 것이다. 여기에 동원된 재원이 바로 국민주택기금, 국민연금, 그리고 공기업 민영화를 통해 발생한 재정수입이었다. 특히 20년이 경과해야 본격적인 연금지출이 시작되는 국민연금의 경우, 신규조성자금의 60% 이상을 재정자금으로 예탁하도록 만들었다. 덧붙여 80년대 말 3저 호황에 따른 경제적 수혜는 이런 중산층 육성전략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노동자 대투쟁으로 분출한 노동자들의 경제적 신분상승 욕망도 노동자계급정치로 모아지는 데 실패한다. 노조 조직력을 바탕으로 생활임금쟁취와 기업복지 등의 수단들을 확보하게 되었지만, 이것이 작업장을 넘어 계급대중정치로 확산하지 못한 채 중산층화에 휩쓸리고 만다. 노동자 생활세계도 중산층화 현상을 겪었던 것이다. 실제 당시 격렬한 투쟁을 이끌었던 대기업 노조들의 단체교섭 요구사항 중에는 임금인상 말고도 내 집 마련이 중요한 요구였고, 단체교섭으로 사원 분양아파트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현대차 노동자들의 자가보유율은 8820%에서 9580%로 증가했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이미 92년 기혼자 자가 보유율이 80%에 이르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내 집 마련은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꿈꾸던 것으로서, 노동자 생활수준의 중산층화를 의미한다. 일단 자기 집이 마련되면 내구재가 모두 바뀌면서 소비 패턴의 중산층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기업복지는 대기업 노동자들에게만 집중된 것으로서 87년 이후 노동계급 형성의 성공적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내부노동시장-기업별교섭-기업복지가 하나의 제도로 정착되었고, 작업장 밖 외부자와의 이질화가 심화하면서 계급연대의 사회적 기반은 약화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확산과 대중의 금융화

이런 지배계급의 중산층 신화 만들기 전략은 자산 형성·복지체계 형성 전략과 맞물려 90년대 중반까지 순항했다. 그리고 93년 김영삼정부가 들어서면서 좀 더 세련된 형태의 금융제도개혁들이 속속 도입되었다. 특히 중산층의 내 집 마련의 꿈을 용이하게 해 줄 주택금융이 크게 확대되었다. 94년 주택금융 여수신금리 자유화, 상업은행의 장기주택금융 허용, 977월 주택은행 민영화 등이 그러하다. 당시 금융개혁의 명분은 금융기관의 자금운용 자율성을 높이고, 내부경영의 자율화를 통해 금융기관의 책임경영을 확립함과 동시에 외환시장 및 자본시장의 국제화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97년 외환위기는 이런 금융제도개혁의 후과로 발생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이후 신자유주의적 금융개혁을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금융개혁에 따른 제도적 준비가 유동적 제약 완화정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려는 정책방향과 결합하면서, ‘대중의 금융화를 급격히 진전시키는 토대를 만들게 되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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