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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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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을 알리는 방아쇠를

누가 당기나?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2000. 새로운 세기가 시작됐다. 여전히 노동자의 삶은 IMF의 짙은 그늘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가장 혈기 왕성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12년이 되어가는 그때 우리는 함께 일하는 친구들이 10여 명이나 됐고, 아직 모두 젊었다. 그동안 만든 작품이 백여 편이 넘어가고 있었고, 그만큼 작업체계도 나름 안정화되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개인 작업이라는 이름으로 그 동안 고민했던 작업 방식을 현실화시켰다. <해고자>와 함께 노뉴단의 대표적인 장편 다큐 <인간의 시간>*은 그렇게 가장 좋은 시절에 개인 작업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49%의 의지와 51%의 상황이 빚어낸 작품

하나의 제작물을 만드는 데, 그 출발을 알리는 방아쇠를 누가 당기나?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에도 대부분이 외부의 단위노조나 산별 조직, 노동조합 중앙 조직 등에서 필요한 영상을 의뢰하면서 출발했다. 작업 의뢰가 많아질수록, 점점 우리는 외부에서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한 그 어떤 출발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혈기 왕성한 만큼, 노련하고 세련되지 못했다. 기술적 시행착오도 많이 하고, 열정과 헌신은 곧잘 작업자의 욕심으로 치부되고, 작업 시간은 예상보다 2배가 더 걸려, 욕은 욕대로 먹곤 했다. 여하간 제작 의뢰된 작업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만도 항상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왜 우리가 출발의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지? 왜 이런 자의식이 왜 없었겠나? 우리는 일 년에 10여 편의 크고 작은 작업들을 8명 정도의 개인 작업자들이 톱니바퀴 맞물리듯 역할을 맡아 작업했다. 개인의 욕구보다는 개인에 대한 조직의 배치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고민들이 항상 내재되어 있었다. “나는 이것으로 충분한가?”, “노뉴단은 이것으로 할 일을 다 한 것일까?”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갈증과 자의식이 아주 조금이라도 해소가 되는 데에는 49%의 개인 의지와 51%의 외부 상황이 자연스럽게 만나야 함을, 우리는 <인간의 시간>을 통해 경험했다.

49%51%의 결합이 아주 자연스럽게 맞물린 행운의 작업이 IMF로 퇴출 기업이 된 현대중기산업 노동자의 450일간의 구조조정 투쟁을 다룬 <인간의 시간>이었다. 노동자에게 퇴출보다 더 절실한 것은 모회사 현대건설로의 고용승계였다.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퇴출의 충격을 다잡고,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현대중기 노동자들은 투쟁에 나섰다.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져 가는 그 끝자락만이라도 영상으로 담아내고자 우리에게 왔다. 제작의 출발 지점에서는, 이미 퇴출에 관한 절차는 모두 끝났고, 마지막 고용승계만 남아 있었다. 그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고, 소박하게 투쟁 보고서를 만들 생각을 의뢰한 측이나 제작팀이나 똑같이 했다. 그러나 고용승계 문제가 잘 안 풀렸고, 투쟁은 길어졌다. 여름이 되기 전에 끝날 것으로 작업 계획을 잡았는데 정작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여름 현대 계동사옥과 광화문을 오가며 천막 없는 노숙투쟁에다가, 투쟁 중 한 동료가 병으로 사망하기까지, 하루하루 살얼음을 걷는 격한 투쟁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투쟁의 끝이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작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외적 동기가 내적 동기로 전환하기까지

이 작업이 비록 제작 기일에서부터 작품의 위상까지 대부분 의뢰자의 요구로 제한되어 있던 작업이었음에도, 투쟁이 길어지면서 생겨난 시간을, 작업자는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보다 많이 작품에 입히는 시간으로, 다양한 미학적 실험들을 집요하게 할 수 있는 시간으로 썼다. 출발의 방아쇠는 비록 외부의 힘으로 시작했으나 이후 모든 과정은 점점 내부 작업자의 힘으로 장악되어 갔다. 이 경험을 조직적 작업을 주로 하는 노뉴단에게는 다소 낯선 개인 작업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작업방식으로 정리했고, 개인 작업은 이후로도 몇 번 더 시도했고, 그때마다 의미 있는 작품들을 남겼다.

450여일 만에 투쟁은 노동자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씁쓸하게 끝났다. 이 투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인간의 시간>은 나오지 않았다. 해를 넘겨 봄도 지나고 여름도 지나고 초가을 문턱에서야 나왔다. 이미 오래 전에 의뢰자의 원성이 자자했었다. 그러나 작품 시사회 후에 너무 늦게 나온 것에 대해서 그 어떤 의뢰자도 타박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작품은 당시 제도권 밖에서 나온 장편다큐 중 만듦새가 가장 세련된 작품이었을 것이다.

 

* <인간의 시간> : 20009/1시간56/제작 : 현대중기산업노동조합-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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