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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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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05.16 18:01

낯선 어떤 이야기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좀 더 싼 우리 사무실은 도로보다 낮은 곳에 점집들이 모여 있는 지저분한 좁은 골목을 지나,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쯤인 작은 야산이 보이는 그 밑에 있었다. 좁은 재래시장 골목을 지나가면서 온갖 생고기 냄새와 생선 비린내와 기름 냄새가 익숙할 때쯤에 골목이 끝나면, 거기에 사무실이 있었다. 오래된 연립주택의 제법 넓은 옥탑이었다. 이전 사무실 크기의 반절 정도여서, 그 많은 촬영 테이프를 풀지도 못하고 이상하게 큰 화장실 한쪽 구석에 쌓아놓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이 새로운 사무실에서 여름과 가을 동안 우리는 당시 유일한 작업파트너인 금속노조와 함께, 이명박 정권의 탄압을 다룬 정세 영상물인 <내일이면 늦으리>와 노동인권 문제를 다룬 <대한민국 1% 노동자>를 만들었다. 겨울이 오고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에는 유난히 더 조용했고 길가에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마치 아무도 찾지 않는 무인도에 고립된 것 같은 답답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들의 초상>은 이런 시간 속에서 만든 작품이었다.


그동안 노동조합에서 조합원 교육 주제는 대부분 당면 투쟁과 조직 과제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 그러나 단체협약으로 조합원 교육 시간을 따내 오랫동안 교육을 해온 현대자동차노조는 이즈음 새로운 교육주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이 새로운 교육의 대표적인 테마는 ‘대안 사회 알기’와 ‘인권 감수성 높이기’였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은 10여 년간 임금도 올리고 노동조건도 개선하면서 노동권을 쟁취했다. 이 노동자의 걸음을 96~97년 IMF 위기가 멈춰 세웠고, 그 이후 10년은 과거 10년 동안 쟁취했던 많은 것을 빼앗기는 시간이었다. 그 10년이 지난 뒤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한 발 더 나아가 기본적인 노동권과 인권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집요하게 탄압했다. 이런 절망과 암흑의 시간을 어렵게 견디면서 노동자들은 ‘지역 연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본주의 체제와 질서가 아닌 다른 대안적인 이야기들을 궁금해 했다. <우리들의 초상>은 이런 궁금증을 조합원들과 함께 나누는 기획이었다.


그동안 일터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자신은 일터와 가정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돌아보니 자신은 ‘돈 버는 기계’, 아이들은 ‘공부 기계’가 되어 있었고, ‘골병든 몸과 마음’에 ‘이기적인 돈의 노예’로 전락한 자신들을 발견했다. 조합원들의 이런 뒤돌아보기는 조합원 대상 설문조사에서 얻은 결론이었다. 다음에 이어진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런 삶을 벗어날 수는 없을까? 돈이 좀 없어도, 공부를 좀 못 해도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품고 우리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 대안적인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들을 찾아 나섰다. 지역 화폐를 쓰고 있는 “두루”, 인구 5명 중 1명이 조합의 영향권에 있는 협동조합 도시 원주, 전주 의료 생활협동조합(생협), 생활 협동 네트워크 “민중의 집”, 부산의 “노동자 생협”, 이렇게 5개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5개의 지역을 찾아다니며 활동가들의 인터뷰를 취재해서 소개했다.


노동자와 노동운동만 다루던 기존 작업과는 달리, 이 작업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가져다줬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문제를 고민하게 했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흥미를 느낀 것에 비하면, 작품은 아쉬움을 남겼다. 단순히 당시 존재하던 활동들을 소개하는 데 그쳤다. 작업 기간 내내 우리는 집중하고 긴장하면서 일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런 테마가 낯설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대안 사회나 대안 문화를 낯설어하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우리에게 <우리들의 초상>은 그렇게 남았다. 낯선 어떤 것. 출근할 때마다 이상하게 매번 낯선 에너지와 낯선 풍경을 마주하면서 드는 낯선 고립감에 당황했던 당시 우리의 새로운 작업실에 대한 기억처럼, 그렇게 남았다. 이 작업이 끝나고 겨울도 끝났다. 우리는 봄이 되자 이 새로운 사무실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는 늦봄에 좀 더 번잡한 도회지로 나왔다.



* <우리들의 초상> 37분/2011년 3월/제작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전주공장위원회, 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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