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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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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청원과 청원의 정치


이승철┃집행위원장



2019년 4월, 가족-동창회-동호회 등 각종 단톡방에서 일대 소동이 일었다. ‘패스트 트랙’을 둘러싸고 여야 정당이 총동원된 국회 활극 이후, 한국당 해산을 위한 청와대 국민청원에 5월 11일 현재 182만 명이 동참했다고 한다. 청원만료일이 5월 22일이니, 청원인 숫자는 200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청원 게시자가 제시한 한국당 해산 청원 이유는 △입법-국정 발목잡기 △소방예산 삭감 등 국민안전 외면 △국민에 대한 막말 등이다. 그리고 해산 청원의 근거는 ‘이미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판례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 청원이 이슈로 떠오르자, 운동 사회 내에서는 작은 논쟁이 일었다. 좀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국민의 분노가 모이는 것이니, 설사 적절하지 못한 절차와 표현이 있더라도 힘을 모으고 북돋아야 한다’는 의견과, ‘한국당 해체야 당연하지만, 대통령 청원-통진당 정당 해산 방식은 위험하며, 민주노총을 비롯해 정부·여당에 맞서는 그 누구든 다음 청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분위기로 볼 때 이 작은 논쟁이 더 커질 것 같진 않지만, 한번 곱씹어 생각해볼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대통령에게 정당 해산을 청원하고, 헌법재판소 심판으로 해산 결정을 구하는 것은 분명 문제다. 운동진영과 우리 사회의 양심적인 세력이 과거 통진당 노선에 대한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정당 해산에 반대하고 나섰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당 해체는 민중의 투쟁과 선택으로 이뤄지는 것이지, 청원을 통한 사법적 효력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설사 이렇게 해산된들, 수구세력은 명패를 바꿔 달고 다시 양지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진영이 이 청원에 적극 나서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보면 간단하지가 않다. 물론 청원으로 한국당이 해산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에 동참한 국민의 대다수도, 한국당도, 청와대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청원에 몰리는 국민’이 아니라, 이 ‘청원을 대하는 정부·여당의 태도’다. 정부·여당은 청원 러시를 ‘민주당 정책에 대한 지지’로 해석하는 한편, ‘우리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혼나는지 잘 보라’는 태도로 의기양양했다. 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은 "그간 한국당 행태에 반감을 가진 분들이 한국당을 한번 혼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결집하는 것 같다"고 논평했다.


패스트 트랙이나 공수처법 등, 자신이 추진하는 법안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를 통해 국민을 설득하는 방식보다, 청원을 계기로 형성된 진영논리를 근간으로 하는 ‘쉬운 정치’를 택한 셈이다. ‘민주당 해산 청원 숫자보다 한국당 해산 청원 숫자가 여섯 배 넘게 많으니, 민주당이 여섯 배 넘게 정당한 것’이란 위험한 논리다. 이 진영논리의 틀에서는 그 반대편에 ‘정부 노동정책을 반대하는 노동자’ ‘정부의 주거정책에 반발하는 도시 빈민’ ‘정부의 쌀값 정책에 분노하는 농민’이 언제 서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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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 청원사이트인 “위 더 피플We the People”에 하나의 청원이 올라왔다.

당시 답변에 필요한 청원인 수였던 2만 5천 명을 훌쩍 넘어 총 3만 4천 명이 참여한 이 청원의 내용은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데스 스타 제작과 그를 위한 재원 확보>였다. 결국 백악관 예산관리국 과학 우주 분야 고문인 폴 쇼크로스가 서면 답변을 등록했다. “현 행정부는 귀하의 고용 창출과 국방 강화 요구에 깊이 공감합니다만, 데스 스타는 계획에 없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답변은 “포스에 비하면 데스 스타의 힘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잊지 말아 달라”는 당부로 끝난다. 이 청원 소동 이후, 백악관은 답변 필요 청원인 수를 기존의 2만 5천 명에서 10만 명으로 상향했다.


이를 두고 유권자들이 백악관을 조롱한다는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았지만, 정작 백악관은 5년에 걸친 위 더 피플 운영을 성과로 평가했다. 대의제에서 직접 접하기 어려운 유권자들의 의견을 백악관에 바로 연결함으로써, 이슈 선점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 때문이다.


청와대도 같은 셈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때론 황당하고 곤란한 청원이 등장하지만, 이를 통해 민심과 직결된 이슈에서 우위를 가져가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물론 청와대가 어찌할 수 없는 질문인 줄 뻔히 알면서도 등록하고 이에 대해 원론적 수준의 답변을 다는 과정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래도 질문한 이는 청원을 통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청와대는 답변을 통해 자신의 정치를 확장한다. 이렇게 ‘정치의 청원’과 ‘청원의 정치’가 만난다.


그래서 운동사회가 곱씹어 봐야 할 것은 ‘화가 나서 찾아가기로 한 곳이 청와대 청원게시판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온갖 대화방에서 새로운 투쟁을 시작할 때마다 청와대 청원게시판 서명을 부탁하는, 전에 없던 풍경이 생겨난 것도 본질적으로 이 현상과 다르지 않다. 거리의 정치가 촛불 이후 오히려 더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 민중의 분노를 담아 대변하고 함께 싸울 대안 정치세력이 부재한 상황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변혁의 정치가, 민중의 투쟁이 청원을 대신하도록 싸워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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