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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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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9.15 18:48

‘의사 파업’,

공정성과 공공성


조형우┃학생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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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4일 민주당과 의사협회가 합의에 도달하면서, 떠들썩했던 ‘의사 파업’은 일단락되는 분위기다(물론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합의안에 반대하면서 상황은 계속되고 있지만). 이번에 의사들이 진행한 ‘파업’은 이전까지 우리가 주로 경험하거나 떠올리던 ‘파업’과는 매우 다른 풍경이었다. 의료 산업화‧영리화의 포석을 놓으려는 정부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의사협회의 이전투구 속에서, 사뭇 비장한 모습으로 집단행동에 나선 의사들이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눈앞의 절박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이 외치던 단어가 엘리트 집단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위해 소비되는 모습에 불쾌함을 느꼈던 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됐든, ‘파업’이란 단어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박근혜 정권 시절 철도 파업 이후 오랜만인 것 같다.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듯한 이 두 파업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대학생과의 결합’이다.



대학생, 7년 전과 지금


지난 2013년 철도 파업 당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 운동이 대표한 대학생들의 연대가 있었다면, 이번 의사 파업은 아예 의대생들의 집단행동과 결합해 진행됐다. 그러나 대학생들의 이 두 가지 행동이 내세운 가치는 정반대인데, 전자가 ‘공공성’이었다면 후자는 ‘공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7년 전, 박근혜 정권의 민영화에 맞선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에 수많은 대학생이 대자보로 지지를 표했다. 캠퍼스 곳곳의 게시판에서, 온라인에서, 거리에서, 대학생들은 철도 노동자들과 함께했다. 그때 그 대학생들이 지키려 했던 가치는 ‘공공성’이었고, 이윤을 위한 경쟁과 사유화는 저지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런데 2020년 지금, 의대생들에게 중요한 가치는 ‘공정성’이다. ‘자신보다 공부를 못하던 자들이 똑같은 지위를 누리는 상황’은 이들에게 ‘저지해야 할 대상’이다. 물론 의대생들의 지나친 이기주의적 태도는 학생 사회 안에서도 적지 않은 반감을 유발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공정성’이라는 담론이 마치 현재의 청년 세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처럼 자리매김했다는 점이다.


사실 의대생들의 이번 집단행동이 청년층 사이에서 그다지 큰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는 이들의 메시지 때문이라기보다는 특수한 정체성과 외부적 요인 때문일 수 있다. 대다수 청년에게 의대는 ‘그들만의 리그’에 불과하고, 코로나 재확산 와중의 집단 휴진과 의사협회장 최대집의 행보에 대한 반감은 의대생들과 다른 청년들 사이에 인식의 괴리가 발생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조건을 차치한다면, 그들의 메시지 자체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준다. ‘공정성’이라는 이름의 저항. 당장 올해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대한 거센 반발에서 나타났던 것과 똑같은 메시지다(이를 방증하듯, 이번 의사 파업에 나선 이른바 ‘젊은 의사 비상대책위원회’는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면서 ‘인국공 정규직 전환’을 공정성 침해의 대표 사례로 호명했다). 그들은 경쟁과 능력주의를 ‘공정성’이라고 표현한다. 7년 전, 돈벌이를 위한 경쟁에 맞서 철도 파업을 지지하던 가치는 증발하고, ‘경쟁은 그 자체로 미덕이며 능력에 따른 차별은 당연하다’는 정서가 뿌리내린다. 심지어 ‘공공성’은 ‘공정한 규칙을 파괴하는 부당한 개입’이라고 취급한다.



‘공정성’의 다른 이름은 ‘착취’다


그렇다면 ‘공정성’은 정말 공정하고, ‘공공성’은 불공정한 것인가? 의사협회와 의대생들은 ‘공정성’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에 반대했다. 그러나 의료 시스템이 공정해지려면, 지역에 따른 차별 없이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의사를 양성하는 과정이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공정해지려면, 지금 같은 고액의 의대 등록금을 폐지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듯 ‘공공성’이야말로 진정 공정함을 위한 길이다. 모두가 돈 걱정하지 않고 치료받을 수 있는 공정한 의료 체계를 구축하려면, 의료 영역 자체를 공공부문으로 사회화해야 한다. 지금 이 사회를 배회하는 ‘공정성’이라는 담론은 실상 불공정을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허구나 다름없는 ‘공정성’이 청년 담론의 핵심이 된 이유는 ‘분노’에서 기인할 것이다. 경쟁에서 우위에 서려는 노력이 위협받는다고 느끼면, 자신의 분노를 기득권 수호와 차별로 표출한다. 그렇게 ‘공정성’이라는 말로 포장한 불공정이 반복되고, 이것이 하나의 담론이 된다. 그러나 ‘공정성’이라는 이름 아래 경쟁은 끊임없이 확대되며, 그런 면에서 ‘공정성’의 다른 이름은 ‘착취’이고 ‘모두가 패자인 경쟁’이다.


이제 ‘공정성’이라는 신화를 깨야 한다. 청년들을 끝없이 경쟁하게 만드는 현실에 분노해야 한다. ‘공정성’을 넘어설 대안은 ‘공공성’이다. 애초에 경쟁에 참여할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이들이 차고 넘치며, 경쟁에서 다른 이를 누른 소수에게만 선심 쓰듯 ‘1등 시민의 자격’을 부여하는 세상에서, 정당하다고 생각한 경쟁이 실은 부당한 것임을 알려 나가야 한다. 의료, 교육 등 사회 제반 영역을 사회화함으로써 공공성과 동시에 진정한 공정성을 쟁취해야 한다. 공정의 척도는 경쟁이 아니라 평등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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