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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9.15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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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위로’로 만족하라?

국영 공공 통신사를 요구한다


J┃KT 노동자



최근 정부가 2차 재난지원금과 함께 약 9천억 원을 들여 13세 이상 국민에게 통신비 2만 원씩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하자, 주변에서 비판과 함께 냉소적인 반응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물론 그 2만 원도 아쉬운 이들이 많지만, 결국 세금으로 해당 금액만큼 통신사들에게 고스란히 지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올해 반년간 KT‧SK텔레콤‧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 영업이익은 코로나 와중에도 작년 같은 기간보다 도합 1천억 원 더 늘어난 상태다. 대통령은 이 통신비 지원에 대해 “정부의 작은 위로이자 정성”이라고 덧붙였다. 우리는 그 ‘위로’로 만족하면 되는 걸까?


“당신의 초능력 KT 5G”. 지난해 KT가 내건 5G 광고 슬로건이었다.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5G를 모든 사람에게 제공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입만 열면 ‘IT 강국’이나 ‘언택트 시대’를 거론하는 오늘날 이 나라에서도 모든 사람이 통신 서비스를 제대로 누리는 건 아니다. 요금을 납부할 여력이 없거나,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지역에 살거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통신 서비스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통신은 전기‧의료‧교통 같은 공공서비스와 마찬가지로 (특히) 현대 사회에서 필수적인 서비스다. 수많은 사람이 모바일로 기본적인 소통부터 업무, 정보 획득, 오락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하며 일상을 보낸다. 집에 돌아가서도 IPTV로 온라인 컨텐츠를 시청하는 등, 통신산업은 광범하고 보편적이며 필수적인 사회적 필요를 마주하고 있다. 그런 만큼 ‘통신 서비스를 공공재로 공급하자’는 요구가 나오기도 했다. 가령, (지난해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제레미 코빈이 대표를 맡고 있던 시기의 영국 노동당은 ‘통신산업 국유화로 양질의 인터넷 서비스를 영국 전역에 무료로 공급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한 바 있다.


현재 한국에서 통신 서비스는 통신 재벌(KT‧SK‧LG)이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원래부터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통신 3사의 뿌리, 

‘공기업’이던 한국통신


한국의 통신산업은 박정희 정권에서 4차례에 걸친 “통신사업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며 본격적으로 뿌리내렸다. 나랏돈으로 통신 설비와 관련 기술을 발전시키며 기본적인 인프라를 갖췄고, 이후 1981년에 정부는 “한국전기통신공사(이하 ‘한국통신’)”를 설립했다. 정식 명칭에서 알 수 있듯 한국통신은 공기업이었으며, 통신산업은 (명분상으로나마) ‘국민복리 증진에 기여’한다는 목적의 공익산업이자 국가 기간산업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통신산업을 민간 자본에 개방하며 큰 변화가 일어난다. 1991년 ‘1차 통신시장 구조 개편’으로 새로운 민간 사업자가 진입함에 따라 기존의 국유 통신산업 구조는 해체되기 시작했고, 이어 2차‧3차 구조 개편으로 통신산업은 더욱 경쟁적으로 변했다. 30여 개에 이르는 사업자가 난립했고, 이들은 더욱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결정적으로, 정부는 ‘완전한 시장경쟁체제 확립’을 위해 공기업 한국통신을 민영화했다. 민영화를 추진한 자들은 ‘세계적으로 민영화가 대세’라며 ‘한국통신은 사기업 같은 이윤 극대화 동기가 없어서 비효율적이고, 정부 규제는 더욱 강화되는 악순환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경쟁을 통해 공기업의 비효율성을 제거하고, 질 좋은 서비스를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1997년 IMF 위기가 터지자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를 급격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2002년 정부 보유 주식을 전부 매각함으로써 한국통신은 지금의 “KT”로 이름을 바꾸고 완전히 민영화됐다.


이에 앞서 공기업 시절 한국통신의 자회사였던 “한국이동통신”이 SK그룹에 인수‧민영화되며 지금의 SK텔레콤이 됐고, 마찬가지로 그 한국통신이 출자해 설립했던 “데이콤”이 매각 이후 LG그룹에 편입되며 2010년 LG텔레콤과 합병해 현재의 LG유플러스가 됐다. 결국 현재 이 나라의 통신산업을 장악하고 있는 재벌 3사 모두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공기업’ 한국통신의 민영화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민영화 이후 통신산업은 경쟁으로 점철됐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구조조정과 인건비 축소 등의 공격이 진행됐다. 이런 방법으로도 생존하지 못한 기업들은 대기업에 인수‧합병됐는데, 이로써 KT-SK텔레콤-LG유플러스 등 대기업 통신 3사 체제가 막을 올렸다. 1990년대 이후 통신산업의 발전은 이들에게 이윤 창출의 터전이었고, 결국 통신 민영화는 재벌에게 그 기회를 준 것이다.



민영화: 재앙과 폐단


한국통신 시절부터 ‘명예퇴직’ 명목으로 인력 구조조정을 시행하던 KT는 민영화 이후 더욱 자주 대량 해고를 저질렀다. 2003년 5,505명, 2009년 5,992명, 2014년 8,304명 등 15년 동안 19,000여 명의 노동자가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떠나야 했다. 민간기업이 된 KT는 최대 목표인 이윤 극대화를 위해 인건비 축소라는 방법을 ‘즐겨’ 썼다. 나아가 ‘인력 퇴출 프로그램’을 만들어 상시적 구조조정과 괴롭힘을 아주 체계적으로 자행했다. 생소한 업무를 부여하거나 비연고지로 발령하고 괴롭히는 등, 각종 탄압과 통제, 감시로 노동자들을 길들이려 했다.


문제는 인력 구조조정에서 그치지 않았다. 기존에 한국통신이 수행하던 업무를 분화해서 새로운 KT의 ‘자회사’를 설립해 떼어냈다. 현재는 KT의 자회사만 37개나 존재하는 형국이다. 이 과정에서 원래 정규직 노동자들이 맡던 일을 ‘자회사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신하게 됐다. 이는 자본엔 비용 절감으로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겠지만, 노동자들에겐 큰 피해를 초래했다.


일례로, KT의 유선통신서비스(일반전화, 인터넷, IPTV) 개통‧수리 업무를 담당하는 자회사 “KT 서비스”의 임금체계는 철저히 성과급 위주로 구성된다. 기본급은 최저임금 수준이고 거기에 ‘실적급’이 추가되는데, 개통 실적과 판매 실적에 따라 격차가 발생한다. 실적급 비중이 커도 절대적인 금액은 많지 않다 보니, 노동자들은 초과근무나 휴일근무수당으로 임금을 벌충한다. 결국 장시간 노동을 조장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별도 회사’라지만, 이 자회사들은 실질적으로 KT의 지시와 통제를 받기 때문에 상품 판매에 대한 압박이 심하다. 매일 실적 보고를 올리고, 그에 따른 평가가 이뤄진다. 그런데 이렇게 KT 상품에 대한 개통‧수리를 담당하고 판매 실적에 대한 압박까지 받지만, 정작 그 자회사 노동자들의 안전에 관한 문제에서 KT의 책임은 사라진다. 지난 2017년 AS 도중 노동자가 고객에게 살해당한 사건 이후에도 산업재해는 계속 있었고, 감전‧추락사 등 수많은 노동자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노동자들은 KT에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했지만, KT 사측은 오히려 ‘노동자들이 안전조치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며 책임을 떠넘겼다.



누가 이익을 봤는가


한국통신 민영화 이후 구조조정과 외주화는 노동자들의 피해를 심각하게 가중시켰지만, 피해자는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앞서 거론했듯 민영화에 찬성하던 자들은 ‘양질의 통신 서비스를 저렴하게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값비싼 통신 요금이었다. 이는 고스란히 통신재벌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수단이 됐다.


예컨대, 한국통신 시절에 이미 세금으로 인프라와 설비를 구축했기 때문에 유지‧보수 업무만 제대로 수행하면 원활한 통신 서비스 공급이 이뤄질 수 있었고, 민영화 이후에도 그 시설들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통신재벌은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2002년 완전 민영화 이후 2013년까지 KT의 순이익은 9조 원을 넘겼다.


이처럼 거대한 이익을 내고 있으면서도 정작 통신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위한 설비투자나 연구개발투자비용은 줄어들고 있다. 민영화 이전에는 매출액 대비 설비투자 비중이 20%대 수준이었지만 민영화 이후 15%대로 축소됐고, 연구개발비 비율도 평균 5.3%에서 2.3%로 하락했다. 반면, 통신 3사의 경쟁적 마케팅 비용과 광고선전비는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2001년 약 3,500억 원 → 2010년 약 3조 원). 통신재벌 사이의 경쟁으로 시민들이 낸 요금은 엉뚱한 데 쓰이고, 통신 서비스의 질적 성장에 필요한 돈은 거대 주주나 고위 임원들에게 돌아갔다. 매년 수천억 원이 배당금으로 주주들에게 배당되고, 고위 임원들도 수억~수십억 원의 보수를 받고 있다. 2013년 이석채 회장은 29.7억 원, 2016년 황창규 회장도 24억 원의 보수를 챙겼다고 알려졌다.



‘작은 위로’로 만족하지 말자


한국통신 민영화는 재앙이었고, 숱한 폐해를 지금까지도 재생산하고 있다. 지난 2013년, 세금으로 만들었던 국가 물자인 인공위성을 KT가 제멋대로 팔아먹었던 희대의 사건은 극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일 뿐이다.


KT가 민영화된 지 근 20년가량 지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KT 회장은 정부의 입김에 따라 선임된다. 게다가 현재 KT의 최대 주주는 지분 13%를 보유한 국민연금공단이다. 국가 기간망산업, 그것도 정부가 그렇게 ‘미래 먹거리’로 떠받드는 통신산업을 정부 스스로도 방목하듯 시장에만 온전히 내맡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통신산업 민영화의 주범이었으며, 시정은커녕 그 폐단을 묵인해왔다.


지금 정부는 통신비 2만 원씩을 지급하며 ‘작은 위로와 정성’으로 봐달라고 한다. 모든 사람의 통신 접근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통신비 지원은 필요할 수 있지만, 그게 왜 세금으로 통신재벌 이윤을 고스란히 챙겨주는 방식이어야 하는가? 대통령이 ‘작은 위로와 정성’이라 표현한 통신비 지원액을 합하면 현재 KT 시가총액의 15%에 맞먹는 거대한 액수다. 소박한 ‘위로’의 금액이 이 정도라면, 아예 KT를 재국유화해서 필요한 이들에게 무상으로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고 국가 책임으로 공공 통신망을 관리하는 것도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 아닌가?


‘작은 위로’로 만족하지 말자. 나랏돈으로 쌓아 올린 기반 위에, 또 나랏돈의 지원을 받아 커지고 있는 통신산업이 사적 기업의 이윤 창출 도구가 돼야 할 ‘당연한 이유’ 같은 건 없다. 관료적 통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과거의 형태가 아닌, 노동자와 시민이 통제하는 공공기업도 얼마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때, 모든 사람이 통신 서비스의 혜택에서 소외당하지 않고, 통신 노동자 역시 비정규 노동과 위험의 외주화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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