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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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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야학 개설…잡지‧기관지 발행

노동자·소작인 조직화…전국 46개 지회 6만여 회원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3.1민족해방운동 이후 민중의 힘을 발견한 운동세력들은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다. 조직 건설은 두 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고, 하나는 민중이 주체가 되어 밑으로부터 조직 건설의 흐름이 이어진 것이다.

임시정부는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등이 설립했으나 친미외교로 독립을 이루려는 노선과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이루려는 노선이 함께할 수는 없었다. 임시정부는 거창한 이름을 달았지만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한 조직이었다.

이와 달리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이 억눌림에서 벗어나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조직을 만드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었다. 3.1운동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확인되고 노동운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조직 건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19년에 노동쟁의가 84건이나 일어났는데 1910~1918년 사이 총 57~58건과 비교하면 폭발적인 것이었다. 투쟁력을 바탕으로 전국 각지에서 노동회, 노우회, 노동친목회, 노동조합, 노동계 등의 이름으로 단체들이 결성됐다. 1920년 33개 단체가 조직돼 활동했고, 1921년에는 원산노동회, 철원노동회, 경성인쇄직공친목회 등을 비롯한 90여개 단체, 1922년 부산노동회, 승호리노동조합, 청진노동회, 인천노동연맹, 경성자유노동조합 등 81개 단체, 1923년 111개 단체가 조직되었다. 대부분 서울 등 대도시 지역에서 선진적 지식인이나 노동운동가들이 인근 지역을 포함한 전국 각지에 진출해 지역 노동운동가나 지식인 청년 등과 연합해 결성한 것이다. 3.1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로 1920년대 초는 조직건설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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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을 통해 무산대중의 전국적 조직 건설

조선노동공제회는 1920년 4월에 창립된 이 땅 최초 전국규모의 근대 노동단체다. 신민회 계통의 민족운동가들과 노동자 대표들이 만나 조선노동문제연구회를 결성했고, 이를 발전시켜 1920년 4월11일 서울에서 발기인 286명을 포함해 678명이 회원으로 참석한 가운데 조선노동공제회를 창립했다.

창립대회 때 발표한 선언문에서 제시한 조직의 목적은 노동자 계급의 지식계발, 품성향상, 환난구제, 직업소개, 저축장려, 위생장려, 일반 노동상황의 조사연구 등이었다. 강령은 “①인권의 자유평등과 민족적 차별의 철폐를 기함 ②식민교육의 지양과 대중문화의 발전을 기함 ③노동자의 기술양성과 직업소개를 기함 ④각종 노예의 해방과 상호부조를 기함”이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운동 목적으로 공제를 강조했으나 그 내용은 민족해방운동과 노동운동을 결합시켜 추진하려는 것이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노동자, 소작인노동자 조직화를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두었다. 그 결과 서울 본회와 전국에 46개의 지회를 설치하고, 약 6만 2천여 명의 회원을 가입시켜 전국적으로 노동자를 조직화하는데 성공했다. 조직형태를 보면 지역별 노동조합이 가장 대표적이었고, 노동자와 소작인노동자를 구분하지 않고 조직했으니 지역 내 다양한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노동잡지 <공제>로 노동의 가치와 자본주의 모순 알려내

조선노동공제회는 수십 차례의 노동강연회를 개최했고 전국 각 지회에서 노동야학·노동강습소를 개설했다. 최초의 노동잡지인 <공제共濟>와 기관지 <노동공제회회보>를 발행했다. <공제>는 1920년 9월10일 창간해 8호까지 발간됐고, 매 호당 발행 부수가 대략 5,000부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노동공제회에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김약수, 정운해, 정양명 등 7명으로 ‘마르크스주의 크루조크’(소조)가 만들어졌고, 이 소조는 편집부의 중심을 이루고 <공제>를 통해 노동문제를 중심적으로 다루어갔다고 한다.

어떤 내용이 실렸을까. <공제> 창간호에 실린 글을 보면,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 하는 그 근저를 알아야 한다. 따라서 노력은 금전이나 기타 물건과 교환할 것이 아니라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노동력을 팔아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 사정은 “현재의 사회조직이 제군의 생활을 약탈하고 압박하기 때문에 본래 자유의 창조인 노동이 제군의 마음대로 되지 못하여 노동이라면 원수같이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동으로 “제조한 생산물은 직접 생산자인 제군의 소유에 속할 것이지 결단코 토지나 기계나 자금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써 그 생산물이 자본가의 소유에 귀치 못하리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제군이 창조한 신발을 나의 발에 신겨라. 그러면 나는 내가 제조한 음식을 제군에게 드리리라. 이러고서야 비로소 노동의 신성이 실현되고 이 우주는 애와 정으로서 건설되리라.”

이것이 운동가들이 생각했던 노동의 신성, 자본주의 모순이며 노동해방이 아니었을까.


[참고자료]

김경일, <노동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8

송찬섭 안태정, <한국의 격문>, 다른생각, 2007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사진: 조선노동공제회 창립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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