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당 사회운동위원회 재현이 쓴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글이 《변혁정치》 52호에 실렸다. 이 글은 같은 변혁당 사회운동위 소속의 지수에 대한 노동자연대 측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이다.
필자가 재현에게 반박하기 전에 먼저, 재현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이하 100인위)의 활동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100인위의 유산
재현은 2000년 인구에 회자됐던 100인위의 활동이 “운동사회 내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칭송한다. 마치 그 사명을 이어받았음을 자임하는 듯하다.
100인위는 ‘운동사회 성폭력 가해자’로 17명의 실명을 인터넷에 공개해 큰 파장을 일으키며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다.(그러나 주류 언론은 선정적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100인위의 폭로가 진보·좌파 내에 존재한 성차별에 대한 반발이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고, 성폭력 등 여성차별 문제에 둔감하던 단체들에게는 이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자극제가 됐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활동이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은 그다지 긍정적이라고 볼 수 없다. 먼저, 그들이 채택해 사용한 무분별하게 확장된 성폭력 개념과 ‘2차가해’ 개념이 문제였다. 100인위 성폭력 개념은 1990년대 중·후반 대학가의 반성폭력 학칙·규약 제정운동을 주도한 근본적 페미니즘의 느슨하기 짝이 없는 성폭력 개념을 수용한 것으로, 여성이 불쾌하다고 느끼는 언행을 모두 ‘성폭력’으로 규정했다. 100인위는 이런 모호하고 주관주의적인 개념에 문제제기를 하는 행위도 ‘2차가해’라는 낙인을 찍으며(실제로 성폭력 행위를 두둔한 것이 아닌데도) 사실상의 ‘성폭력’으로 취급했다.
이렇게 성차별적 행위나 여성 비하 행위 일반을 성폭력이라고 부르는 용어법은 차별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 방식이 차별의 양상이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은 아니다. 각 행위의 구체성을 없애 버리고 모두 성폭력으로 뭉뚱그리면(추상성 문제), 도리어 성차별의 구체적 양상을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특히, 작은 문제가 심각한 범죄처럼 터무니없이 부풀려질 수 있는 한편, 여느 차별 행위보다 각별히 피해자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기는 강간의 심각성을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
아마도 가장 큰 문제는 무책임한 온라인 폭로 방식으로, 이는 운동 내의 성폭력을 없애겠다는 좋은 취지를 무색케 했다. 신뢰받는 기구의 진상조사도 거치지 않은 채 순전히 피해호소인의 진술만으로도 해당 사건을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가해자’의 실명을 온라인에 공개한 것은 독단적 방식이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에게 온라인 폭로 전에 해명 기회도 주지 않았다. 심지어 피해호소인이 사건 공개를 원치 않아도 공개했다. 이 때문에 성폭력에 반대하고 피해자를 기꺼이 도우려는 사람들조차 100인위에 거부감을 가졌다.
그러나 반성폭력 운동의 전사들 앞에서 이견을 말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성폭력이나 성차별에 진지하게 반대하지 않는 사람으로 매도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필자는 당시 100인위 방식의 난점에 대해 나름 용감하게 문제 제기했다가 ‘명예 남성’ 취급을 받았다. 필자가 보수파들의 편협한 성폭력 정의에 명백히 반대하고,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반동적 편견에 반대했음에도 말이다.(당시 필자의 주장은 2001년 2월 1일에 쓴 ‘운동권 내 성폭력 가해자 명단 발표, 어떻게 볼까?’, 《열린 주장과 대안》 8호를 보시오.)
이런 도덕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진보·좌파 안에 ‘피해자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이 자리 잡았다. 100인위의 유산은 변혁당이 동참한 노동자연대 비방 운동과 도서 폐기 운동에서 보듯이 지금도 남아 있다.
물론 ‘피해자중심주의’를 보수적 사법 관행과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에 맞서 피해자 편에 서려는 좋은 취지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해 주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그리고 성폭력 사건의 경우 목격자나 물증이 없는 경우가 흔해서 물증만을 증거로 인정하면 피해 여성들에게 매우 불리하므로, 그 난점을 해소하자는 취지를 사주려는 경향이 있다.
이렇듯 여성의 피해 호소가 무시되지 않도록 하자는 ‘피해자중심주의’의 애초 취지를 많은 사람들이 이해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양한 형태의 다른 증거들을 무시하고 피해자의 진술만을 근거로 사건을 판단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사법 절차든 공동체 내 사건 처리든 그런 식으로 예단하면 오판의 가능성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특히, ‘피해자중심주의’가 흔히 주관주의와 결합돼, 성폭력 개념이 무한정 확장된다. 기존 법률의 협소한 정의를 넘어선 합당한 확장(성관계에서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삼는 성폭력 정의)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잠재적으로 모든 거슬리는 행위가 성폭력이 될 수도 있다. ‘줄담배 피우며 이별을 통보한 상황이 불쾌했다’며 어떤 여성이 상대 남성을 성폭력으로 제소한 사건(‘서울대 담배 사건’)이 괜히 일어났겠는가?
또한 ‘피해자중심주의’를 일관되게 실천하면 진상조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피해호소 여성의 말이 곧 진리인데 제3자들이 하는 진상조사가 왜 굳이 필요하겠는가? 100인위가 충분한 진상조사도 없이 피해호소인들의 진술에만 기초해 온라인 폭로를 한 것은 “피해자중심주의의 기계적 해석과 적용”의 결과가 아니라 그 개념을 제대로 실행한 것이었다.
도전받는 ‘피해자중심주의’/’2차가해’ 개념
100인위가 채택해 사용한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개념은 재현의 오해와 달리 2000년대 반성폭력운동 전체가 수용한 원칙이 되지 못했다. 사실 100인위의 활동은 당시에도 여성운동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당시 주류 여성단체들의 반성폭력운동은, 비록 실명 공개에 따른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린 100인위 성원들의 법정 투쟁을 지원했어도, 원칙상으로는 100인위 입장을 지지하지 않고 거리를 뒀다.
‘피해자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은 2000~2001년 당시에는 상당수 좌파들도 수용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 개념을 수용한 곳에서는 이후 온갖 혼란과 갈등이 빚어졌다.
그래서 여성운동과 노동운동 모두에서 그 개념에 비판적 문제의식을 갖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게 됐다. 2009년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등 여러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이 모인 비공개 집담회에서는 ‘집담회에 참석한 단위부터라도 ‘2차가해’라는 용어 사용을 지양하자는 공동의 합의’[1]가 있었다. 2016년에는 100인위를 주도했던 전희경 씨조차 ‘피해자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이 모두 문제를 야기했음을 인정하게 됐다.[2]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개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의구심을 자아내거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은 올해 5월 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한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재론을 위한 토론회에 사람들이 보인 뜨거운 관심에서도 드러났다. 이 토론회에 활동가를 포함해 무려 350여 명이 참가했다.[3] 만약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개념이 긍정적으로만 사용됐지 별 문제가 없었다는 일각의 주장이 맞다면, 왜 민우회의 이 토론회가 그리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는지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다.
‘피해자중심주의’가 단지 피해자를 존중하고 그 목소리를 경청하자는 것일 뿐이라는 재현의 주장은 참말이 아니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 한국의 반성폭력운동에서 사용돼 온 ‘피해자중심주의’가 단지 그런 의미로만 사용됐다면, 성폭력 피해자 편에 서 온 여성운동 내에서 ‘피해자중심주의’/’2차가해’를 둘러싼 논쟁이 왜 일어났겠는가?
재현은 100인위를 찬양하면서도, 어정쩡하게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담론의 “한계”를 이렇게 지적하기도 한다. “[그 담론은]성폭력 사건의 공동체적 해결을 위한 계기로 나아가지 못하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2차가해자로 지목당하지 않기 위해 사건 자체를 함구하거나 외면했던 한계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현은 운동사회가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라는 “개념의 적용과 실천이 피해자를 절대 권력화하거나, 2차가해를 이유로 침묵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고 그 개념을 잘 사용하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운동사회”가 다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개념을 받아들이는 양 가정하는 표현법은 거슬리지만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겠다.) 또한 “운동사회는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담론을 기계적으로 해석하거나 적용하지 않기 위해 진정한 공동체적 해결의 방향은 무엇인지 끊임없지 질문하며 답을 찾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담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기계적 해석과 적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현이 말한 그 담론의 “한계”는 어디서 생겨났는가? 그런 담론의 생산자들은 피해자를 절대화하거나 도덕주의적 비난으로 이견을 억누른 적이 없는데도 그런 담론의 수용자들이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했다”는 것인가? 이렇게 ‘피해자중심주의’/’2차가해’ 개념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그것의 “기계적 해석과 적용”을 문제 삼는 것은 남 탓하는 책임 전가일 뿐이다. 피해자 절대화와 이견 억압은 ‘피해자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피해자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을 선용하면 문제가 없다는 재현의 주장은 언어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언어는 사회적 관습에 따라 형성돼 사회 변동의 영향을 받아 변화된다. 비록 운동사회가 협소할지라도 이 원리는 적용된다. 어느덧 그 한 쌍의 개념들은 근본적 페미니즘 지지자들이 성폭력 문제를 가장 두드러지는 이슈로 부각시켜, 여성들에게 남성 전체를 경계하게 만들고 남성 출입금지 영역과 의제를 확보하여, 기성 사회나 운동 사회의 일정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존속돼 왔다. 이 목적에 적합하다고 판단된다면 근본적 페미니즘 지지자들은 그 한 쌍의 개념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재현도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개념의 폐지에 반대한다. 폐지된다면 ‘가해자의 무죄를 입증하는 방편으로 적극 활용’된다는 이유로 말이다. 동시에 그는 ‘피해자중심주의’를 ‘피해자관점’으로, ‘2차가해’를 ‘2차피해’로 대체하자는 운동사회 일각에서 등장한 대안을 우호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제안이]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담론의 전면적인 철회나 폐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도무지 모호하기 짝이 없다. 기존 개념이 유효하다는 건가, 아닌가? 아무 문제 없다면 새 개념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아니, 새 개념이 아니라면, 기존의 것이 부정될 위험에 놓인 바람에 그저 말만 바꾸는 것인가? 자민통계가 ‘통일전선’, ‘국민연합’, ‘전국연합’, ‘단일전선’, ‘상설연대체’ 등등으로 말을 여러 번 바꾼다 해도 그 전략과 조직체의 본질이 동일한 것처럼, 변혁당도 말장난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기려 하는가?
‘피해자중심주의’/’2차가해’를 ‘피해자관점’/‘2차피해’로 대체한다 해도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피해자의 주관적 경험이 유일한 근거라는 점에서 전혀 차이가 없고, ‘2차피해’라는 말도 순전히 주관적인 성폭력 개념을 방어하는 용어로 사용한다면 옛 것과 차이가 없다. 실제로, 최근 노동자연대를 비방하는 사람들도 ‘2차가해’와 똑같은 의미로 쓰면서도 말만 ‘2차피해’로 바꿔 부르고 있다. 피해자가 있으면 가해자가 있는 것이므로, 잔머리 굴려 말 바꾸기로 도망가려 해선 안 될 것이다. 그 가해자가 ‘구조’나 ‘체제’, ‘제도’, ‘이데올로기’ 따위가 아니라(구체적인 개인이라)면 말이다.
불화를 일으키는 근본적 페미니즘
100인위가 무한 확장 가능한 성폭력 개념을 사용한 것은 모든 남성이 성폭력을 자행할 수 있다는 근본적 페미니즘의 가정을 수용한 결과였다. 물론 100인위가 근본적 페미니즘의 반(反)성폭력 사상을 수용한 것이 단순히 이론적 탐구의 결과는 아니었다. 진보·좌파 내에서 성폭력, 여성 비하 등이 일어나고 여성의 피해호소가 무시된 경험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들이 이런 일들을 알게 될 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분노는 정당하지만 면밀한 조사와 냉철한 분석 없이 분노를 핵심 동력으로 삼아 도덕주의적 방식의 운동을 벌이면 애먼 피해자가 생기거나 잘못된 일반화를 하는 등 위험한 사태를 초래하기 쉽다.
이로부터 100인위식 반(反)성폭력 사상이 도출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모든 남성이 잠재적 성폭력범이라면 좌파 남성도 예외일 수 없고, 이들도 성폭력 은폐에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고, 운동사회의 성폭력을 폭로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핵심적 실천이 돼야 한다. 100인위가 공신력 있는 기구에 진상조사를 의뢰하지 않고 온라인 폭로를 한 주된 이유는 남성이 지배하는 운동사회는 성폭력을 은폐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점도 100인위 성명서에 잘 표현돼 있다.
또, 개인들의 상이한 수치심 경험을 죄다 성폭력으로 규정하면, 다양하고 상이한 형태의 여성차별을 성폭력으로 환원해, 여성차별에 맞선 투쟁이 사실상 반성폭력운동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무엇보다, 여성들은 개인관계에서든 사회운동 내에서든 한낱 무기력한 피해자로만 여겨지게 된다.
그리고 개인들이 겪는 피해에 초점을 두면 개인들의 행위와 인식을 형성하는 사회의 구조와 작동 방식은 대체로 무시된다. 개인들의 경험을 폭넓게 수렴한다고 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 방식과 계급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험주의적 접근법은 계급적 설명이 곧 차별을 무시하거나 은폐하는 것이라며 계급적 관점과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기각하게 된다. 여성운동의 핵심 목표는 일상생활 속에서 남성과 맞서 싸우는 것이 되고, (남성) 노동계급은 사회변혁의 주체가 아니라 문젯거리가 된다.
이렇게 남성을 성폭력과 여성차별의 원인으로 보는 근본적 페미니즘의 사회이론은 여성차별의 물질적 근원인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세력인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성차별에 맞선 투쟁의 힘을 되려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근본적 페미니즘은 때때로 주류 여성운동을 비판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없고 계급관계를 무시하므로, 주류 여성운동의 약점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흔히 다양한 개혁주의 정치로 흡수돼 왔다. 1990년대 중·후반 한국의 ‘영 페미니스트’ 중 많은 사람이 NGO, 학계, 개혁주의 운동들과 조직들로 흡수됐다. 여성운동 주류처럼 그들도 계급을 무시하고 개인의 해방에 초점을 두었다. 이런 류의 급진주의는 노동계급 여성들의 조건 개선과 해방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근본적 페미니즘 지지자들의 반성폭력운동은 노동운동 안에 불필요한 갈등과 분란을 자아내 왔고, 여성운동을 소규모 독선적인 무리가 벌이는 배타적인 운동으로 비쳐지게 만드는 구실을 톡톡히 해 왔다. 따라서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여성들의 해방을 이루려는 좌파라면 근본적 페미니즘을 추수해서는 안 된다. 그런 추수는 노동운동의 힘을 약화시키고 결국 개혁주의 세력들을 강화할 뿐이다.
또한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노동자 정치조직을 원심화(탈중앙화)시켜 지도력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피해자중심주의/2차가해의 사각지대
노동자연대는 성폭력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여성차별에 반대하며 오랫동안 여러 성차별 반대 투쟁을 지지해 왔다. 그리고 여성해방을 위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분석과 전략을 제안하며 투쟁 참가자들에게 해방의 혁명적 전망을 제시하려 노력해 왔다. 이런 우리의 오랜 실천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연대를 ‘성폭력 가해’ 단체라고 계속 주장하려면 적어도 그에 걸맞은 근거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재현은 지수에 대한 우리의 반론이 “여전히 사실을 왜곡”한다면서도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왜곡했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논증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개념을 비판하면 성폭력 가해자에게 이롭다고 반박하거나, 증거주의를 주장하면 그것이 곧 “가부장적 사회인식”이나 다름없다는 비약을 한다.
재현의 이런 흑백논리는 성차별 문제를 자기처럼 바라보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정도는 반(反)여성적일 수밖에 없다는 독선이다.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개념을 수용하지 않으면 성폭력 가해자에게 이로울 뿐이라는 재현의 주장은 강변일 뿐이다.
변혁당이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동자 연대〉 최미진 기자의 책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논쟁》(책갈피) 앞 부분 몇 페이지만 읽어 봐도 재현이 이 책의 목적과 내용을 모르고 있음이 금세 드러난다. 이 책은 노동운동과 여성운동 내에서 확산되고 있는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가해’ 개념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더 일관되고 효과적이 되게 하기 위한 대안을 제안하고 있다.
더 효과적인 운동 건설을 위해 펴낸 책에 ‘성폭력’ 낙인을 찍고 책 폐기 운동까지 하는 것은 많은 활동가들의 진지한 고민을 무시하는 행동이다. 이렇게 토론과 논쟁 자체를 봉쇄하려는 시도는 운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다. 여성운동이 내향적인 소집단들의 운동에 머무는 게 아니라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이 대거 동참하는 운동으로 발전하려면 운동에서 사용하는 용어·전략·전술은 언제나 공개적인 토론과 논쟁의 대상이 돼야 한다.
재현은 우리가 대안으로 제안한 증거주의가 피해자의 진술을 무시하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우리는 증거를 물증만으로 협소하게 여기는 관점(물증 유일주의)에 반대하고 피해호소인의 진술이 증거의 일부임을 분명히 밝혔다. 변혁당과 비방 운동가들이 폐기하라고 주장하는 최미진 기자의 책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논쟁》(책갈피)은 이렇게 쓰고 있다.
“필자는 ‘증거주의와 피해호소 여성 진술 존중의 종합’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안한다. 주관주의에 바탕을 둔 ‘피해자중심주의’는 증거주의로 대체돼야 한다. 증거주의는 물증만이 성폭력 입증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보는 물증 지상주의와는 다르다. 물증만이 아니라 진술도 증거다. 여성의 진술도 중요한 증거의 하나다. 단, 피해호소인의 진술일지라도 그 일관성과 타당성을 따져 봐야 하고 관련자들의 증언과 물증도 확인용 근거로 포함시켜야 한다.”[4]
따라서 “성폭력 사건 해결을 증거주의로 전환하자는 노동자연대의 주장은, 가부장적 사회 인식과 그에 기반해 만들어진 법·제도로 성폭력 사건을 판단하자는 것”이라는 재현의 주장은 순전한 오해의 소산이다.(어쩌면 ‘증거’를 물증으로만 오해하는 소치인 듯도 하다.) 증거에는 당연히 피해자의 진술이 먼저 고려돼야 한다. 하지만 다른 증거들과 충돌한다면 신중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재현은 “노동자연대가 피해자중심주의를 피해자의 주관적인 판단과 결정으로 폄하”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피해자중심주의’는 실제로 그런 것이다. 100인위 등이 실천한 ‘피해자중심주의’는 피해자의 주관적 판단에 진실의 권위를 온전히 부여한 것이었다. 100인위의 성명이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성폭력은 … 피해자의 고통과 판단에 입각하여 정의되어야 하며, 피해자의 경험과 언어를 통해서 언제나 확장 가능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5]
100인위를 지지하는 재현도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는 아무 관심 없이 피해호소인의 주장만으로 우리 단체를 성폭력 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대학문화’ 편집부의 세 남녀 대학생의 뒤풀이에서 일어났던 6년 전 사건과 그 후속 과정을 재현이 ‘성폭력’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는 야한 동영상(포르노)를 보게 된 여성이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는 주장밖에 없다.
포르노 같은 성 상품화의 형태는 여성의 신체와 성에 대한 왜곡된 상을 심어 주며 여성을 한낱 성적 대상으로 취급하는 세간의 인식을 반영하므로 사회주의자들은 포르노 등 성 상품화에 반대하고 성 상품화가 사라지는 사회를 지향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의 포르노 단속과 검열을 지지할 수는 없다. 역사적 경험을 살펴보면, 부르주아 국가의 검열과 단속은 포르노업자 단속보다는 비폭력적 성 표현물과 피임, 낙태 합법화, 성소수자 해방 등 급진적인 주장을 담은 간행물 검열로 쉽게 이어졌다. 또한 보수적 가족 이데올로기 강화와 경찰력 강화를 위한 도덕적 정당화에 이용된다.
변혁당 사회운동위 지수도 포르노가 성폭력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2016년 말 포르노를 다룬 그의 기사에서 지수는 포르노의 문제점을 왜곡된 여성 이미지 양산의 측면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물론 포르노가 성범죄의 원인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 ‘포르노가 성폭력을 일으킨다’는 인식은 성폭력을 여전히 ‘성욕’ 프레임에서 인식하려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 포르노는 여성억압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산물이[다].[6]
지수의 이 기사는 지난해 8월 변혁당 정치캠프에서 이뤄진 발제와 토론 내용을 요약한 글이다. 그러나 토론 내용을 요약한 기사 뒷 부분을 읽어 보면, 변혁당은 포르노와 성범죄와의 연관성, 포르노에 대한 국가 검열 문제에서 내부적으로 의견이 통일돼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변혁당 자신도 포르노에 관한 견해가 통일돼 있지 않으면서, 재현은 왜 포르노 시청 자체가 (피해호소인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성폭력이라는 주장을 우리 단체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가?
포르노 시청이 무조건 성폭력이라는 주장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맺음말
사실 많은 변혁당원들은 소위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이라는 것에 별 관심도 없고 사건 내용도 거의 또는 전혀 모른다. 그런데도 간부들은 그저 노동자연대에 대한 험담과 뒷담화, 낙인찍기가 유용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무엇에 유용하느냐 하면, 바로 기존의 노동자주의와 이를 비판하는 근본적 페미니즘, 그리고 환경주의 등이 병존하는 모호한 정치이다.
이런 공존을 가능케 하는 것은 노동자주의 전통 속에 머물러 있는 활동가들이 기존 관성을 버리지 못했다고 비난받을까 봐 근본적 페미니즘을 비판하지 않는 분위기, 이로 인해 약화된 집중주의 등일 것이다. 가령 한상균 선본 선거운동 초기에 노동자연대를 배제하라는 H대책위의 메일이 왔을 때 당시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변혁당의 전신) 남성 활동가들의 반응에는 온도 차가 있었지만, 추진위 내 근본적 페미니즘 지지자들의 견해를 거슬렀다가는 심각한 조직 분란에 휘말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즉, 위에서 말한 ‘병존’이 위태롭게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선거 이후 맑시즘2015 행사 때 김태연 씨는 연사로 초대돼 발제한 반면, 김시웅 씨는 맑시즘 포럼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당신들은 2011년 7월 16일 ‘대학문화’ 편집부 수련모임 중에 두 남성과 한 여성 사이에 실제로 일어난 일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가? 남성 A가 여성에게 동영상 보여 준 행위에 강제성(심리적 위압 포함)이 있다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가? 4각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던 남성 B가 “신나게 추임새를 넣으며 이죽거렸”는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가?
동영상 본 여성이 그렇다고 말해서? 그들 세 명을 직접 신문한 민사법원 판사는 동영상 보여 준 게 강제적이었는지 “단정할 수 없다”고 했고, 테이블 건너편의 남자가 가해 ‘공범’이라는 여성의 주장은 “허위사실”이라고 결정했다.
변혁당은 전지(全知)한 신인가? 밀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당사자들에게 직접 물어 조사한 변호인들과 재판관보다 당신들이 정확하게 진실을 안다는 것인가?
그저 피해호소인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밖에 없잖나. 그러나 다른 증거들은 여성의 주장을 반증하는 것들이 많다. 따라서 상충하는 주장들 사이에서 겸손하게 상대적 회의론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
이런 겸손함의 결여 또는 진실은 관심없다는 자세를 통해, 28년 동안 노동자 투쟁과 성차별 반대 투쟁을 한결같이 지지하고 그런 원칙을 자체의 활동에도 일관되게 적용하려 애써 온 한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를 먹칠하며 고소해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단체에서는 10여 년 전 노동자의힘 안에서 일어난 한 간부의 여성 회원 강간 사건 같은 것이 일어난 적이 없다. 그 사건에 관해 당시 우리는 그 단체의 당시 여성 회원한테서 정확하고 비교적 자세한 사건 내용을 들었지만, 우리는 그 단체를 ‘강간범 비호 단체’라거나 ‘성폭력 2차가해 단체’ 따위로 부르지 않았다. 아예 보도도 하지 않았다. 피해자 여성을 동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단체가 자체 규율과 원칙으로 자체 징계 처리를 잘 할 것이라고 보아 그랬던 것이다.
우리는 변혁당이 우리를 이렇게, 도덕적 신뢰를 갖고 대해 주길 바란다. 개인이 아닌 단체(더구나 동료 좌파 노동단체)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 《2017 공동체 내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 ―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토론회 자료집》,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2017. 9쪽. [본문으로]
[2] 전희경, ‘계속, 끝까지, 페미니스트로’, 《페미니스트 모먼트》, 그린비, 2016. 183~184쪽. 물론 나중에 두 개념에 대한 전희경의 비판적 평가는 정작 본인이 100인위를 이끌던 시절 다룬 구체적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3] 이 토론회에 대한 자세한 논평은 〈노동자연대〉 209호 최미진의 기사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토론회에서 제기됐어야 했을 쟁점들’을 보라. [본문으로]
[4]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논쟁》, 책갈피, 2017. 47~48쪽. [본문으로]
[5] ‘피해자의 경험에 입각한 확장된 성폭력 개념의 정립’(2000.12.26). [본문으로]
[6] 지수, ‘우리에게 포르노란 ― 가부장·자본주의사회 전복 향해야’, 〈변혁정치〉 36호(2016.12.1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