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배제한 대중이 분노하다

by 사회변혁노동자당 posted Jun 3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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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목 영국의 EU 탈퇴를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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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배제한 대중의 분노 
- 영국의 EU 탈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영국 인민이 투표율 72.2%와 51.9%의 찬성으로 유럽연합(EU)의 탈퇴를 결정했다. 1973년 EU의 전신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이래 43년 만에 탈퇴를 선택한 것이다. 이번 국민투표가 기록한 투표율은 1975년 유럽경제공동체 탈퇴를 안건으로 한 국민투표가 기록한 64.6%보다 훨씬 높으며, 투표율 72.3%를 기록한 1992년 영국총선 이후 가장 높다. 
역사적인 결정 이후 쏟아지는 언론 보도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영국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결정했는지조차 모른 채 정치·경제적 자살을 선택했고, 자산가격 폭락 앞에 ‘리그렉시트(Regrexit)’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브렉시트 캠페인을 주도한 진영이 인종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인종주의의 승리라는 관점에서 이번 국민투표를 바라보게 된다면 브렉시트의 의미는 간명하다. 그것은 국수주의가 변방의 저소득, 저학력 노동계급을 사로잡은 결과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런 관점으로 사태를 보게 되면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자국은 물론 전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간 영국인들에 대한 비난뿐이다. 이번 투표에서는 우익 탈퇴입장, 우익 잔류입장, 좌익 탈퇴입장, 좌익 잔류입장이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물론 브렉시트 찬성입장 안에 인종주의 선동을 주도한 영국독립당(UKIP)을 비롯한 이주민 혐오세력이 섞여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른바 ‘폴란드 배관공’, 곧 동유럽에서 온 저임금 노동자들이 영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분노가 실존한다는 것, 그리고 시리아에서 쏟아져나오는 난민들에 대한 혐오가 실존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1,700만 명이 넘는 브렉시트 찬성자들 모두가 인종주의자는 아니다. 브렉시트 찬성은 저소득층에서, 저학력층에서, 빈곤한 지역에서, 쇠락한 공업지역에서 높다. 전통적 노동당 지지층의 상당수는 당론인 유럽연합 잔류에 반기를 들고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졌다. 「가디언」 따르면 노동당의 심장부인 리버풀의 중심부는 노동당 당론인 ‘잔류’를 선택했지만 도심에서 벗어난 노슬리, 세인트헬렌, 위건 등은 모두 유럽연합 탈퇴가 우세를 기록하며 빈곤과의 상관관계를 드러냈다. 다른 통계도 있다. 여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구의 비중이 높은 지역에서 브렉시트는 우세하다. 제반 요소들과 브렉시트 찬반의 관계를 종합해보자. 브렉시트의 원동력은 ‘세계화’에서 소외된 노동계급의 분노다. 영국인들은 EU가 약속한 세계시민으로서의 공영을 허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청년인구의 투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중요한 부분이다. 투표한 청년층은 유럽연합 잔류지지가 압도적으로 높다. 설문조사 결과는 투표에 참여한 18∼24세 청년층의 72~75%가 EU잔류를 선택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브렉시트 찬반을 세대 간의 대결로 묘사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며 실제로 상황은 더 복잡하다. 18∼24세 청년층의 투표율은 36%에 불과하다. 일반적 경향인 젊은 층의 낮은 투표율을 감안해도 이는 2015년 영국총선 당시 18∼24세 투표율인 43%, 2010년 영국총선의 44%보다도 한참 낮다. 전 국가가 브렉시트 문제로 떠들썩한 역사적 선택의 순간에, 젊은 층의 다수는 기권했다. 또한, 젊은 층의 선택에서 역시 지역과 계급 문제가 작용한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등 연령 중위값 30세 전후의 젊은 대학도시가 기록한 투표율은 70%를 웃돈다. EU 잔류입장과 학력, 계급의 강력한 상관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확실한 것은 유럽연합 밖에 존재했던 영국을 경험한 연령층이 EU에 더욱 강한 반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를 ‘대영제국에 대한 향수’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브렉시트는 무엇보다 고립주의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세계화에 대한 회의는 민족주의와 결합했고, 고립주의는 그 결과물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대영제국 안 해도 좋으니 일단 우리부터 먹고살자.”


영국 노동계급은 왜 브렉시트를 택했는가. ‘시티’의 금융자본가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노동계급은 자신의 계급이해에 따라 투표했다. 즉, 노동계급은 EU가 자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유럽의 주변부인 그리스와 스페인의 노동계급에게건, 중심부인 영국 노동계급에게건 EU의 본질은 같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낳은 자본의 영토이자, 그 추진체다.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 복지삭감과 강제 긴축, 신자유주의적 균형재정의 강제가 EU의 기조다. 그리고 브뤼셀에 있는 EU 집행위원회는 그 누구에게서도 선출되지 않았지만, 유럽을 좌우하고 있다. 노동계급은 EU 안에서 이 경향을 통제하거나 바꿔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영국은 유로존이 아니며 유럽과의 통합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2012년 유럽 재정협약의 일원도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EU는 회원국들에게 신자유주의와 긴축을 강제해왔다는 것이다. 곧, 이는 통합유럽 헤게모니의 약한 고리에서 시작된 반란이다. 「파이낸셜 타임즈」에 따르면, 브렉시트 이후 미국은 대유럽전략을 재조정하고 있다. 미국은 EU에 긴축정책을 완화할 것을 주문했고 영국에는 나토에서 더 큰 역할 맡아줄 것을 주문했다. 미국은 브렉시트의 의미를 올바로 읽었다. 

자본의 세계화는 영국 노동자계급을 황폐화시켰다. 앞서 말했듯 이번 투표가 드러낸 것은 세계화와 금융화가 낙오시킨 노동계급의 분노다. 대처정권은 영국을 금융산업의 천국으로 만들었고, 노동계급의 물질적 토대를 허무는 한편 모두가 자본가가 될 수 있다는 신화를 창조했다. 신노동당은 이를 제3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똑같이 이어받았다. 산업혁명의 국가에서 산업 노동계급은 몰락했다. 1978년 전체 일자리 중 25%가 제조업이었다면, 지금 이는 8%에 지나지 않는다. 공업지대는 쇠락했고 스스로 노동계급의 일원임을 자랑스러할 수 있었던 영국 노동계급 특유의 지역사회는 해체되어 갔다. 브렉시트는 그에 대한 반란이다. 


캐머런 영국 총리는 “브렉시트는 3차대전을 촉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경고가 드러내듯 유럽통합을 낳은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대응이었다. 곧,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국가 간 이해충돌을 조율하고 보호무역주의 발호를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 유럽통합의 본질적 추진 동기였다. 즉, EU는 자본가 국제주의의 구현이다. 
물론, 자본의 국제적 확장은 다른 한편으로 노동계급 국제연대의 물질적 토대다. 국제시장과 지구적 자본주의의 그 자체가 노동계급 국제연대의 물질적 조건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지금 EU는 노동자 국제주의의 토대인가? EU라는 자본주의 초국가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자유무역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같다. 우리는 자유무역에 반대하지 않으나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협정’은 ‘자유무역’의 실체에 부합하지 않으며 그 실상은 군사적 지역 블록화를 동반하는 초국적 자본의 이해실현 경로이기 때문이다. EU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국가가 없어지지 않는 한, 곧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자본가들의 국제주의는 항상적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으며, 영국의 EU 탈퇴는 그 취약한 국제질서가 약한 고리에서부터 깨져나가기 시작했음을 말한다. 


이번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역시 잔류건 탈퇴건 자본을 위한 투표이기에 ‘보이콧 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정세에 기권한다고 해서 정세가 우리를 피해가지는 않으며, 이를 드러내듯 브렉시트 국민투표의 투표율은 역사적으로 높았다. 
브렉시트에는 좌와 우가 뒤섞여있지만, 그것이 드러낸 것은 분명하다. 영국 노동계급은 ‘이것은 우리가 원한 유럽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좌익이 그 분노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건 말건, 사태가 드러내는 본질은 분명하다. 노동자의 국제연대가 충분히 강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한 당연하며 우리는 언제나 이 제약 속에서 행동해 왔다. 그 어떤 세력이 이미 준비된 상태로 대중의 혁명을 맞이한 적이 있었는가? 또한, 위기의 고조가 촉발하는 대중의 분노가 이미 정교하게 조직된 형태로, 그야말로 질서정연하게 분출된 적이 있었는가? 그랬다면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정세를 맞이하며, 대중의 분노는 뒤틀린 형태로 드러난다. 역사의 변곡점은 바로 지금이다. 자본가들의 국제주의, EU라는 초국가가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자본의 위기는 그 우익적 해결방식인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함께 불러오고 있다. 이와 맞서 싸워야한다. 사회주의가 대중의 분노를 조직하지 못한다면 극우가 그 역할을 대신할 것이다.



2016년 6월 30일
사회변혁노동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