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변혁정치

> 변혁정치

보건의료 노사정이 모여 

차별을 합의하다!

 

선지현충북

 


협상이란 게 주고받는 겁니다

한발 물러서서 양보할 것과 취할 것을 생각해야 합의가 이뤄지는 것이죠

 

당신은 이 말에 동의하는가? 언뜻 보기에 이 말은 보편타당한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명백한 자본의 관점이다. 억압과 착취체제를 기본으로 한 자본주의에서 노사관계는 노동자들이 이미 많은 것을 빼앗긴 상태에서 시작되는 관계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노사 간에 이뤄지는 협상(교섭)은 어쩌면 덜 빼앗기기 위해택하는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 속에서는 노자 간의 관계가 팽팽했던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그 때조차도 빼앗겼던 것을 일부 되찾아오는 것에 지나지 않거나, 아주 조금만 빼앗기는 것이었다. 이를 넘어서려면? 그건 혁명이었다. 그래서 주고받기 식 협상’, ‘양보와 타협이란 자본의 입장에서 더 빼앗겠다는 것이거나, ‘빼앗은 것을 다시 내어줄 수 없다는 표현일 뿐이다. 그렇기에 양보는 가진 자의 미덕일 순 있어도 덜 빼앗기려는,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는노동자의 관점이 될 수는 없다. 비정규직 문제는 더더욱 그러하다.

최근 민주노총 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공공병원 파견용역직 정규직 전환에 대한 표준임금체계 가이드라인>(이하 표준체계 가이드라인’) 합의는 노동조합의 교섭 원칙과 관점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사건이었다. 보건의료노조는 강력해지는 자회사 흐름을 막아내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통일적인 임금체계를 마련해 정규직 전환의 물꼬를 트기 위해이번 교섭을 진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규직전환을 취하기 위해 저임금을 고착화시키는 직무급제를 합의해 준 것이라는 말이다. 주고받았다는 얘기다. 저임금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해왔던 지난시기 자본의 유연화 정책을 유지하는 정규직 전환. 그게 무엇을 취한 것이란 말인가!

 73-포커스_공공병원 노사정TF합의.jpg

9.28 의료연대 서울·대구경북 민들레분회 공동파업 출정식


차별을 전제하고 시작한 교섭

보건의료 노사정 T/F 합의는 기본원칙 중에 하나로 파견·용역직의 정규직 전환에 따른 별도직군 관련 규정을 의료기관별로 마련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보건의료노조는 이를 두고 파견·용역직에 대한 통일적인 임금체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공공병원에서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체계가 있음에도 별도의 임금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 정규직/비정규직으로 위계화 된 고용구조, 차별적인 임금체계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미 정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전환을 추진하면서 간접고용 상태를 유지하는 자회사, 차별적인 임금체계(정부 표현으로는 표준임금체계)의 도입을 주장해왔다. 나아가 이를 계기로 소위 유연한 안정성이라는 이름 하에 전체 노동자의 임금인상 억제(와 삭감)를 위한 새로운 임금체계 도입(직무급제)을 시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보건의료노조는 직접고용이라는 명분으로 별도의 직군 도입을 전제로 교섭을 시작함으로써 정부의 직무급제 전면 도입의 물꼬를 터준 것이다. 임금인상 억제를 위한 임금체계 도입이, 가장 열악한 위치에 놓인 저임금 노동자를 상대로 시작되는 참으로 기막힌 결과다.

 

차별행위의 주체가 자본과 정부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 교섭

보건의료노조는 이번 합의를 두고 현재 공공병원 파견·용역직 직무들의 임금수준을 고려해 임금체계를 마련했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 공공병원에서 일하는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이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저임금 노동자들이다. 현대판 노예제라고 하는 비정규직 제도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보건의료노조가 기존 임금 수준을 고려해 임금체계를 마련했다고 말하는 것은 공공병원에서 일하는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저임금 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합의 내용에 의하면 공공병원의 미화·주차·경비·식당·콜센터 노동자들을 모두 <가군>으로 직무를 구분해, 해당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으로 시작해 오래 일해도 최저임금의 1.17배로 임금상한선이 정해졌다.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직무를 저임금을 받는 직무로 규정한 것이다.

이는 노동조합운동 안에서도 저임금을 받아도 되는 일’, ‘낮은 가치라는 위계화 된 차별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고, 노동조합운동의 평등과 연대의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노동조합 상층 관료들의 차별 의식이 이번 사태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한다면 과도한가?

 

비정규직 주체들을 철저하게 배제한 교섭

보건의료 노사정 합의는 공공병원 간접고용 노동자들을 비롯해 공공부문 비정규노동자들의 권리를 침범하면서까지 이뤄진 것이다. 공공병원에는 보건의료노조만 있는 게 아니다. 특히 미화업무를 비롯한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일반민주연맹, 여성연맹, 공공운수노조 등 다양한 산별노조에 가입돼 있다. 정규직 노조만 보건의료노조 소속이고, 간접고용 노조들은 다른 산별노조에 속해 있는 경우도 많다. 병원이 아니더라도 공공부문에는 동일한 직무에 속해 있는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부지기수다. 이 노동자들은 공공부문 전반에 영향을 미칠 이번 보건의료 노사정 합의 과정에 전혀 개입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의료연대 소속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인 서울·대구경북 민들레분회는 자회사와 별도 직군분리 시도에 맞서 파업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번 합의에 직격탄을 맞은 관련 산별노조들은 규탄성명을 내고 합의 폐기를 요구했다. 이에 보건의료노조는 보건의료노조 소속 단위에만 해당된다며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그럼 보건의료노조가 있는 공공병원 소속의 타 산별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어떤 적용을 받는 것인가? 보건의료노조가 있는 병원 사업장의 사용자들은 정규직 노조와 노사정 합의를 했으니 밀어붙일 것이다. 그랬을 때 비정규노동자들이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우리는 봐왔다. 자동차 하청노동자들의 14년에 걸친 투쟁을 보라! 그 뿐인가? 노조가 없는 공공병원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으로 품었던 희망을 모두 거둬야 할 판이다.

 

노사정 합의, 투쟁하지 않고 내어주겠다는 것

보건의료 노사정 합의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 결정을 앞둔 민주노총의 행보에 더 큰 우려를 낳게 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여해 의제별, 업종별 위원회를 가동하면서 회의를 거듭하고 있지만 쟁점이 첨예한 문제들은 논의 의제를 선정하는 데에만 4~5차례 회의를 거듭하고 있고, 노사정대표자회의가 가동되는 중에도 정부와 자본은 규제완화 법을 거침없이 통과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는 노동조합의 핵심 요구들에 대해서는 노···공익위원 모두가 합의해야만 추진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결국 양보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뒤로 물러나 주고받을 것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보건의료 노사정 합의는 노동조합이 차별행위의 주체로 서라는 것이었다. 비정규노동자들의 안정된 고용을 대가로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저항을 사전 봉쇄하는 것이었다.

그건 결국 노동조합의 교섭을 싸우지 않고 내어주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래놓고 교섭과 투쟁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 k2s0o1d6e0s8i2g7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