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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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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 2015.07.15 12:48

민족주의 엘리트들, 식민지 인정‧안주

노동자‧농민,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192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이 활발함에 따라 조직도 늘었다. 1920년부터 1935년 사이 전국에서 조직된 노동조합의 수는 4,294개였다. 이중 1920~1923년 사이에 315개, 1924~1929년 사이 1,714개, 1930년대 초중반 2,265개가 조직됐다. 일제강점기 가장 활발하게 운동이 진행되고 조직이 건설된 시기는 1930년대 초중반이다. 노동쟁의도 마찬가지인데 치안유지법이 제정된 때를 전후로 쟁의가 약간 줄었다가 1927년 이후 늘어 1931년에는 205건, 21,180명이 쟁의에 참가했다.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일본의 경제도 타격을 받아 식민지 수탈 체제를 더욱 강화한 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 조직들은 선진적 청년, 사회주의자들이 직접 결합하거나 조선공산당, 사상단체들과 관계를 가지며 만들어졌다. 특히 지역에서는 사상단체들이 조직 결성을 주도했다. 사상단체들은 1923년 8월 마산에서 최초로 조직된 ‘혜성사’를 비롯해 1926년 말에는 전국에 338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비합법 비밀결사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합법운동으로 진출하면서 노동자 농민 단체의 결성과 지도에 중심 역할을 한다.


암태도 소작쟁의 등 농민운동도 격렬

농민운동도 격렬해졌다. 8할 이상이 농민, 그중 8할 이상이 소작인이었고 소작제도는 일제 수탈체제의 근간을 이뤘기 때문이다. 소작쟁의는 1923년 176건, 1924년 164건이었고 이후 참여인원도 늘어 1931년에는 667건 10,282명으로 최고를 보였다. 대표적인 것이 1923년 9월부터 다음해 9월까지 전남 무안군(현 신안군) 암태도에서 일어난 소작쟁의다. 섬사람 전체가 먹고도 남을 농사를 짓고도 7~8할의 소작료를 내느라 배가 고파야 했던 소작인들이 소작인회를 만들어 소작료를 4할로 내리자는 쟁의를 시작해 1년에 걸친 투쟁 끝에 승리한 것이다. 지주 문재철에게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며 싸우자 일제가 개입하면서 더욱 격렬한 투쟁으로 발전했다. 쟁의 과정에서 소작회 간부들이 잡혀가자 남녀 농민 6백 여 명이 배를 타고 건너가 목포경찰서와 재판소 마당에 누워 두 차례 집단농성,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 투쟁은 동아일보에 30차례 이상 보도될 정도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이후 1924년 황해도 재령 북률면 동척농장의 소작쟁의, 1929년 평북 용천 불이농장의 소작쟁의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식민지수탈의 핵심이었던 쌀을 둘러싼 대표적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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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 이 사진은 소안도에서 농민대표로 참가했던 강사원이 갖고 있던 것으로 1989년에야 완도의 소안도 벽장 속에서 세상 밖으로 온 것이다. 그의 손자 강정일은 "아버지께 이것을 간직하려고 목숨을 걸었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준성, ‘조선노농총동맹’ 중에서, 사진 : 한길사]


전국조직으로서 노동자 파업 직접 지도‧지원

노동쟁의, 소작쟁의가 분출함에 따라 노동자 농민운동의 전국적 통합을 이루려는 사회주의자들의 노력으로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됐다. 조선노농총동맹의 강령은 조선노동공제회에 비해 목표와 원칙이 분명해졌다.

강령은 “①오인은 노농계급을 해방하고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함 ②오인은 단체의 위력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철저적으로 자본계급과 투쟁할 것을 기함 ③오인은 노농계급의 현하 생활에 비추어 각각 복리증진, 경제향상을 기함.”이었다. 그리고 결의안에서 “지방 노동자단체 조직 지원, 노동운동의 근본정신과 배치되는 단체 파괴, 강습소와 팜플렛 등으로 노동자계급의식 고양, 노동자 임금을 최저 1일 1원 이상, 노동시간은 8시간제로 할 것” 등을 명시했다. 조선노농총동맹은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민족개량주의를 배격하는 태도를 명백히 하였다. 그러니 결성과 동시에 일제의 탄압이 뒤따랐다.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된 이후 전국 각지에 있던 노동운동 단체와 농민운동 단체들이 거의 가입했고,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여 가입하기도 했다. 당시 총동맹에 가입한 노농단체는 260여 개소, 그 회원 수는 5만 3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조선노농총동맹은 창립 이후 노동쟁의나 소작쟁의를 50여 건이나 해결했다. 특히 노동자 파업을 직접 지도하였는데 그 예로 알려진 것이 1924년 9월 초 서울 용산제등고무공장 노동자 200여 명의 파업, 1925년 2월 경성대동공업인쇄주식회사 노동자 150여 명 파업, 1~3월 걸쳐 진행된 경성전기회사 500여 종업원들의 파업 등이다. 그리고 1925년 2월 서울 가등정미소 결복인부 파업, 1926년 5월 경성방직 파업에도 관여했고 1930년 부산 조선방직 파업도 지원했다.

노농총동맹은 일제의 탄압, 조직 내부 이견, 노동자 농민이 같은 조직에 있던 데서 오는 문제점 등으로 조직운영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1927년 9월 전 조직 투표를 통해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화됐다.

일제 탄압의 가속화, 민족주의 엘리트들의 식민지 인정과 안주 등에 맞서 노동자 농민은 현실 투쟁에 가장 적합한 조직을 만들고 투쟁하면서 제국주의에 도전한 것이다.


[참고자료]

김경일, <노동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박순동, <암태도 소작쟁의>, 청년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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