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변혁정치

> 변혁정치
117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11.18 15:05

개작두 수능


강후┃서울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수능을 치러 들어갔던 고사장에서 벌어진 일이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1교시 언어영역(요새는 ‘국어영역’이라 부르지만) 답안지에 마킹하면서 손이 덜덜 떨렸다. 고등학교 3년간 매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모의고사까지 치렀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지난 18년간의 인생을 탈탈 털어 넣고 앞으로 수십 년의 더 긴 삶을 가르게 될지도 모를 한판이 여기에서 결정된다는 느낌 같았달까. 비합리적인 만큼이나 현실적인 무게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속을 타들어 가게 했다.


하지만 그 불쾌한 떨림보다 더 뇌리에 박혔던 건, 시험 종료 뒤에도 채 마킹을 끝내지 못했던 옆줄의 한 수험생이었다. 그는 종료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답안지 교체를 요청했는데, 감히 넘겨짚기 어렵지만 아마 그 역시 감당키 어려운 긴장 속에 마킹 실수를 했던 것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결국 시험 종료 벨이 울렸고, 감독관의 지시에 따라 모든 학생이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있을 때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새 답안지를 하나라도 채우고자 매달렸다. 감독관이 곧바로 그에게 손을 놓으라 경고했고, 끝내 멈추지 못했던 그는 결국 답안지를 빼앗긴 채 쫓겨났다. 이렇게 그는 ‘부정행위자’가 됐다. 그가 느꼈을 간절함을 모를 수 없기에, 애처로웠다기보다는 지켜보면서도 참담했다.


매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수능이 다가온다. 기세등등하던 코로나도 수능을 막진 못했다. 단지 조금 지연시켰을 뿐. 올해 내내 학교 수업이 차질을 빚었지만, 그래도 시험은 강행한다. 어차피 수능은 학교 수업 열심히 듣는다고 치를 수 있는 시험이 아니라는 걸 교육당국도 인정한 걸까.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이 있는지 평가하겠다(대학력평가)’는 이 시험의 취지와 결과, 존재이유가 온당한지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또 한 번의 수능이 곧 치러진다. 그런데 실상 이 시험은 ‘대학수학능력을 평가’하기보다는, ‘수험생을 어떤 등급의 대학에 배정할지 가르는’ 용도 아닌가? 그렇기에 단 1초라도 다른 사람보다 늦으면 ‘부정행위’로 탈락시키는 개작두가 된 것은 아닌가.


무엇보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게 왜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사람만이 누리는 제한적 권리여야 할까? 자본주의에서 그 답은 간단하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양질의 고등교육을 제공하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거다. 그렇게, 인간의 여러 ‘특기’ 중 하나일 뿐인 학업(그중에서도 대단히 제한적 범위의 공부) 성취도를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사람이 ‘좋은 대학’의 학위를 따고 ‘좋은 일자리’를 얻어 ‘우월한 인생’을 향유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된다.


사회주의에서 대학의 문을 시험으로 넘어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초중등교육을 넘어선 수준의 교양과 교육을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무상으로 대학을 개방하고, 학교 이름이 인생 등급을 결정하는 서열제도 철폐할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입시에 낭비하던 막대한 사회적 자원을 사회주의에서는 조건 없이 모두에게 양질의 고등교육을 제공할 기반을 갖추는 데 사용할 것이다. 103년 전 러시아혁명을 성공시킨 뒤,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의 교육인민위원으로 선출된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는 기존 대학교육을 비판하며 “현재 대학은 학위 생산공장에 불과하다”고 했다. 지금 우리는 100년 전보다 얼마나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