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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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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4.01 18:39

한위건 1896~19371

사회주의운동의 이론가


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1937년 7월 10일 중국공산당 해방구였던 연안의 교아구 휴양소에서 한 조선인 혁명가가 눈을 감았다. 그의 이름은 한위건. 중국공산당 하북성위원회 서기 겸 천진시위원회 서기로, 나이는 41세였다. 그는 왜 머나먼 연안에서 생을 마감했을까?


한위건은 1896년 함경남도 흥원 출생이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오성중학교를 거쳐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에 입학한다. 1919년, 러시아혁명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의 영향으로 국내외에서는 독립운동이 꿈틀거렸다. 국내에선 이미 1918년 말부터 천도교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런 정세 속에 한위건은 1919년 1월 하순부터 경성의전 대표로 서울 6개 관립‧사립 전문학교 학생대표들과 함께 대규모 반일시위를 위한 학생 지도부를 구성하고, 3월 1일 탑골, 3월 5일 남대문, 3월 6일 종로 일대의 시위를 지도했다.


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자 상해로 망명한 그는 신채호가 주필로 있던 주간신문 <신대한>의 편집진으로 참여했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한 그는 그해 10월, 훗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는 김세연 등과 “공산주의 연구회”에 참여하면서 사회주의자로 거듭났다. 1924년 귀국한 한위건은 <시대일보>와 <동아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는데, 1925년 결성된 조선공산당에 바로 가입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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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조선공산당부터 본격적 당 활동


그가 본격적인 당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6년 3~11월경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는 ‘분열된 운동선의 통일’을 주장한 양명 등이 조직한 레닌주의동맹을 중심으로 ‘정우회 선언’이 발표되던 때다. 한편으로는 6.10 만세 운동으로 검거를 피한 유일한 중앙위원이었던 김철수가 후계조직을 정비하던 때이기도 하다(<변혁정치> 101호, “권오설: 6.10 만세운동 기획자” 참조). 그는 12월 6일 조선공산당 2차당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다. 3차 조선공산당, 세칭 “ML당”의 출발이었다.


그가 활동했던 3차당 시기는 외형적으로 각 분파의 대립이 해소되었으며, 전국 923개 가맹단체를 망라하는 조선사회단체 중앙협의회를 조선공산당이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또 민족통일전선기관인 신간회를 창립한 시기다. 하지만 동시에 책임비서 안광천을 둘러싼 내분이 격화했고 책임비서가 4번이나 교체된 시기다.


일제의 침탈도 시작됐다. 1928년 2월 2일 30여 명이 구속된 ‘3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발생한다. 위기를 모면한 한위건은 같은 달 27일 아현동에서 비밀리에 열린 3차당 대회에서 사업보고를 했다. 책임비서로 노동자 출신인 차금봉이 선출됐고 그는 검사위원장으로 선임됐다.2 하지만 어렵게 조직된 4차당에 대대적 탄압이 다가왔다. 7월 5일 시작된 대대적인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10월 초까지 170여 명이 구속된다. 그는 구속을 피해 다시 상해로 망명한다.


한위건이 상해로 망명했던 시기에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인 “조선 농민과 노동자의 임무에 대한 테제”를 발표했다. 이 “12월 테제”는 조선공산당의 고질적 문제인 분파투쟁을 해소하라고 주문했다. 지식인 서클에서 벗어나 노동자‧농민 대중과 혁명적 민족운동진영 내에서 투사를 획득해 노동자와 빈농이 중심이 되는 당을 다시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12월 테제”에 따라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당을 해산하고 당 재건 투쟁을 전개했다. 한위건도 예외는 아니었다. 1929년 1월까지 양명과 함께 상해에서 기관지 <계급투쟁>을 발간한다. “조선혁명의 특질과 노동계급 전위의 당면임무” 등을 기고하며 사상통일에 복무했다. 같은 시기 그는 ‘1국 1당 원칙’에 근거, 1931년 4월경 이철부(李鐵夫)라는 이름으로 중국공산당 북경당 조직에 정식으로 입당해 화북지구에서 지하활동을 시작했다.


지하활동을 전개하던 시기인 1932년, 그는 아내 이덕요를 뇌막염으로 잃는다. 그가 상해로 망명했을 때 임신 중이었던 이덕요는 혼자 딸을 낳아 키우다 같은 병으로 잃은 바 있다.3 1933년 중국공산당 하북성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던 한위건은 1926년부터 중국공산당 당원이었던 장수암(長秀岩)을 만나 결혼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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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노선의 집행자… 사후 정당성 인정


이 무렵 중국공산당 이론가였던 왕명은 중국혁명이 임박했다는 판단 아래 즉각적 총파업과 무장봉기를 일으켜야 한다는 좌경 노선을 견지했다. 이러한 극좌 노선으로 북평과 천진의 당 조직이 심각한 손실을 보았다. 한위건은 ‘좌경모험주의와 맹동주의의 오류’를 비판하고 “극히 큰 위기가 잠재하여있기에, 주관적 역량을 정돈하여 진정한 볼세비키적 당의 강화가 시급”함을 주장하는 한편 “그렇지만 지금의 당의 지도자들에 의해서는 이 과업을 완수할 수 없으므로 7차 당 대회를 열어 이 문제를 해결하자”5는 의견서를 하북성 당위원회에 제출했다. 이 주장은 당내에서 반우경 투쟁의 주요한 대상이 되어 부부가 함께 조직선마저 단절된다. 하지만 한위건은 당의 특과(特科)6와 연계 속에서 천진에서 항일구국통일전선 사업으로 당 활동을 지속했고, 1935년 북평 12.9 시위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준의 회의”를 통해 왕명 노선이 청산된 후인 1936년 봄, 중국공산당 북방국 주재 대표인 류소기가 천진에 와서 그를 하북성위원회 서기 겸 천진시위원회 서기로 임명했다. 1937년 5월 연안에서 소비에트 구역 당대표 회의가 열리자 한위건은 백색지구 당대표로 참석했다.


하지만 오랜 지하활동과 고문 등으로 폐결핵을 앓고 있던 한위건은 장티푸스까지 겹쳐 사망하고 만다. 1940년, 그의 동지이자 아내였던 장수암은 연안에서 당 중앙에 글을 올려 ‘철부노선’에 대한 명확한 처리를 요구했고, 중국공산당은 ‘철부노선’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1 한위건의 출생연도는 1901년과 1896년 두 가지다. 전자는 1983년도 료녕인민출판사에서 발행한 김형직의 글이며, 후자는 1924년 일제가 작성한 요시찰인 명단과 자료다. 이 글에선 후자를 인용한다.


2 전명혁, “철부(鐵夫)노선의 주창자, 한위건과 사회주의 운동”, <내일을 여는 역사> 22호, 2005, 168쪽.


3 무명초, “愛人ㅼㅏ라 異域孤魂이 된 女醫 李德耀의 北平客死哀話(애인따라 이역고혼이 된 여의 이덕요의 북평객사애화)”, <신여성> 1932년 7월호, 74쪽.


4 김형직, “철부로선의 집행자 중공하북성위 서기 리철부(1901~1937)”, <중앙인민방송국> 2015-11-08 09:54:00.


5 김형직, 위의 글.


6 정식 명칭은 특무공작과. 1927년 장개석의 상해 쿠데타(국민당 장개석이 공산당을 무력으로 기습, 수많은 공산당원을 제압하고 살해한 사건) 이후 창설되어 1935년까지 존속한 중국공산당의 정보보위조직.